- "호랑이 같은 아낙, 배도 잘 부려…"
- 200년 전 남도바다의 여성 활약상
- 김려가 '우해이어보'에 그려

- 양반·천민 결혼 그린 '방주의 노래'
- "빈부귀천 어딨나, 운명 개척하자"
- 탈근대적 대담한 평등사상 담아

- 유배시절 경험담 '사유악부'에도
- 봉건적 사회상 고발 이어져

인간의 평등성을 제도화하기까지 서양사는 약 1800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근대화에 뒤진 우리나라는 이보다 100여 년 더 흘러야 했다. 그러나 사회제도가 아닌 문학작품으로는 우리도 서양에 비해 그리 늦지 않다.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엄존했던 19세기 초, 경상도 진해에서 인간관의 혁명이 일어났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바다생물 조사서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쓴 담정(藫庭) 김려(金鑢·1766~1822)에 의해서다. 그는 백정의 딸과 양반의 아들이 결혼하는 내용의 서사시를 쓰는 등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들을 통해 봉건적 신분제를 해체해버렸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우해이어보의 산실인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만을 여행하며 담정의 시에 나타난 근대적 인간관을 살펴본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광암항에 정박한 어선에서 어부들이 채취해온 홍합을 트럭에 옮겨 싣는 모습.

■남도 여인 활력에 주목

우해이어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어민들의 활기찬 일상이다. 갓 잡은 물고기처럼 생동적이다. 담정은 특히 남도의 여인들에 집중한다. '양도의 튼실한 아낙 호랑이 못지 않구나(羊島健娥虎不如·양도건아호불여)/머리에 수건 쓰고 두멍에 정어리를 담고 있네(頭兜瓦盛魚·두두와참성증어)'. 양도는 진동면 고현리 해안서 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0.3㎢ 크기의 작은 섬이다. 아낙의 일하는 모습이 얼마나 억척스러웠으면 호랑이에 견주었을까. 진해의 노동 현장에서 남녀는 동등했다.

어디 진해뿐이랴. '고성의 어촌 아낙은 배도 잘 부려서(固城漁婦慣撑船·고성어부관탱선)/키를 돌려 뱃머리를 열자 제비처럼 날아가네(棙柁開頭燕子翩·여타개두연자편)'. 진해 서쪽에 위치한 고성의 여인들도 야무지긴 마찬가지다. 고기잡이 항해 등 못 하는 게 없다. '섬마을 각시들 남자처럼 튼튼해서(島村閣氏健如南·도촌각씨건여남)/엉덩이 크고 허리 넓어 유행에 어둡지(膀濶腰豊竗理暗·방활요풍묘리암)'. 종일 일에 매달려 사느라 몸단장이나 유행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해풍에 절고 햇살에 그을린 몸이지만 그래도 바다처럼 싱싱하다.

달빛 교교한 밤이면 그들의 여성성은 절정에 오른다. '고요한 밤 깊은 계곡 달빛 고운데(夜靜谷沈月色美·야정곡침월색미)/문어 그림자 이끼 낀 물가에 어지럽다(鰝蹄弄影鬧苔磯·고제농영뇨태기)/어촌 여인 정분난 땡중이 온 줄 알고(村丫錯認情僧到·촌아착인정승도)/바삐 빈 침상에서 내려와 사립문 열어주네(忙下空床啓竹扉·망하공상계죽비)'.

	진해관아 인근에 위치한 진동공설시장.

담정은 "문어(고제)는 달 밝은 밤이면 물에서 나와 해변과 돌밭의 대나무 우거진 숲을 돌아다니니 스님의 모습과 같다고 어부들은 말한다"고 산문에 적었다. 여인은 그 문어를 눈 맞춘 스님으로 착각하고 문을 열어준다. 일도 열심, 사랑도 열심인 남도 여인들의 활력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시다.

지난 23일 진해 어민들의 건강한 일상을 찾아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진동면 진해관아 아래 진동공설시장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바닷가답게 횟집이 즐비했고, 횟집마다 제철을 만난 전어 등 각종 어패류가 수족관에 가득했다. "숭어와 광어, 우럭, 가리비는 양식이지만 꽃게와 문어, 오도리(보리새우), 참고둥, 주꾸미는 진동만에서 나는 자연산입니다." 횟집 '철이수산' 주인 소순정(55) 씨는 수족관에 든 어패류를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 참고둥은 오늘 새벽 바다에 나가 바위에 붙어 있는 것을 이 '쪽채'로 긁어 잡은 겁니다." 그는 장대에 작은 그물을 매단 도구를 들어 보였다.

	광암항 전경.

진동공설시장에서 서쪽으로 1㎞가량 들어간 해안에 자리 잡은 광암항에는 어선들이 빼곡히 정박해 있었다. 한 어선에선 어부 3명이 그물 자루에 담은 홍합을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 트럭으로 나르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배로 30분 거리에 있는 양식장에서 채취해온 겁니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칩니다." 40대로 보이는 어부는 이것저것 묻는 기자의 말문을 농담으로 막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발길을 구산면 쪽으로 옮겼다. 구불구불 이어진 리아스식 해안은 뱃사람들의 풍어가처럼 흥겨웠다. 다구리 마전리 명주리 등 마을들은 논밭을 등 뒤에 둔 채 해안을 향해 몸을 낮게 엎드리고 있었다. 마을 앞바다에는 바람에 맑게 씻긴 가을 햇살이 쏟아져 은빛 고기떼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수우도 죽도 닭섬 곰섬 북섬 납섬 징섬 장구섬…. 그 바다에는 수석 작품을 전시한 듯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널려 있었다. 담정은 유배 시절 이 섬들을 매일 누비고 다니며 어민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바다생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은 시와 산문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그런 글쓰기는 만인이 평등한 근대적 인간관을 낳았다.


■도학적 사유 아닌 생활의 시

	진동면 다구리 풍경. 녹색 논밭과 푸른 해안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담정의 평등사상은 진해 유배에 앞서 함경도 부령에서 싹텄다. 그는 천주교인인 친구 강이천(姜彛天·1768∼1801)의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돼 1797년 부령에 유배됐다가 1801년 신유박해로 사건이 확대되면서 배소가 진해로 옮겨졌다. 평등사상이 깃든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진해에서 쓴 서사시 '방주의 노래'다. 시의 원제목이 '장원경의 아내 심 씨를 위해 지은 고시'인 것을 미루어 그가 부령에서 만난 실제 인물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미완성인데도 무려 702행에 달하는 대하시다.

	'우해이어보'에 등장하는 문어(왼쪽)와 정어리.

시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처녀 방주와 백정인 그의 아버지, 조선시대 군관 직위의 하나인 파총 벼슬을 하는 양반이다. 개울가에서 방주를 만나 물 한 그릇을 얻어먹은 파총은 방주의 어엿하고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며느릿감으로 낙점한다. 그날 밤 방주의 집을 찾아간 파총은 방주의 아버지에게 사돈을 맺자고 청한다. 반상의 격차를 이유로 고사하는 방주의 아버지에게 파총은 봉건적 신분제를 뒤엎는 파격적인 말을 한다.

'가난한가 부유한가 물을 것 없고(貧富本不問·빈부본불문)/양반이다 상민이다 따질 것 없소(地閥誰敢論·지벌수감론)/잘되는가 못 되는가 앞날의 일은(將來窮與達·장래궁여달)/자식들 팔자에 매인 것일 뿐(八字所關係·팔자소관계)/백 가지 중 사람 하나 똑똑하다면(百中當身一·백중당신일)/그 나머지는 논할 게 뭐 있겠소(餘外復何計·여외복하계)'.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며, 빈부귀천 따위의 당사자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조건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이 말보다 근대적 인간관을 더 잘 드러낸 언급이 있을까? 빈부가 대물림되면서 계급화하는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이 발언은 근대를 넘어 탈근대 내지 초근대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것 같다.

	사유악부

담정의 이런 시적 경향성은 시집 '사유악부(思牖樂府)'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이 시집에 실린 272수의 시들은 부령 유배 시절의 경험담으로, 진해에서 지난날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썼다. 그는 시집 서문에서 자신의 시를 "도학적 사유를 담지 않고, 직접 보고 겪은 백성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했다.

활쏘기의 명수이자 병법과 역사에 통달한 지덕해, 얼굴 여덟 군데를 창에 찔리고도 도적놈을 노려보며 개돼지라 꾸짖은 우 씨 부인, 남편에게 달려든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윤 열부, 왜놈 장수를 사로잡거나 목 자른 북방의 장사들…. 시집은 부령 지역 백성들의 강인한 생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진정한 영웅이다. 담정은 시에서 이들의 고결한 도덕성을 찬양하는 반면,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탐관오리와 토호들을 불같이 규탄한다.

그러다 많은 글을 의금부에 빼앗겨 불태워지는 필화를 당한다. '연희가 타이르던 말, 글짓기 조심하소(蓮姬戒我作文字·연희계아작문자)/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리다(人世紛紜易觸忌·인세분운이촉기)'. 부령에서 만난 연인 연희는 담정의 날카로운 붓놀림을 염려하며 자제를 당부한다. 하지만 담정은 지배층의 타락상과 봉건적 신분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정직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삶은 한 편의 울림 큰 서사시가 되어 다가온다. 담정이 한반도의 남북 끝자락에서 천부인권을 발견했듯이, 우리는 그에게서 참시인을 발견한다. "여기, 변방에 시인이 있었다!"


※우해이어보

진해의 옛 이름인 우산(牛山) 앞바다에 사는 바다생물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묶은 책. 담정이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에 휘말려 진해로 유배 온 지 2년만인 1803년에 완성됐다. 어류 53종, 패류 11종, 갑각류 8종 등 총 72종의 생태와 이것들을 잡아 거래하고 요리해 먹는 어민들의 일상이 담겼다. '우산잡곡'이란 별도의 제목으로 39수의 시도 수록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