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지 이순신'이라 불린 매헌 정기룡
- 적은 병력으로 임란 60여 전투 전승
- 덕·용맹 다 갖춘 목민관 칭송 받아

- 울창한 숲과 들녘 사이 굽이치는 강
- 경천대, 1300리 물길 중 최고 비경

- 벼랑이 반달처럼 굽어진 용소엔
- 매헌이 용마 길들였다는 이야기도

자천대(自天臺). '하늘이 만든 경치'라는 뜻이 담긴 경북 상주시 사벌면 경천대(擎天臺)의 별칭이다. 사벌면과 인접한 예천군 풍양면에서 내성천과 금천을 받아들여 몸집을 키운 낙동강은 경천대에 이르러 1300리 물길 가운데 최고의 비경을 빚어냈다. 경치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인물 또한 빼어나다.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의 영웅,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이 대표적이다. 명승과 인걸이 어우러진 경천대 기행은 내딛는 걸음마다 즐거움이 넘친다.

경천대에서 바라본 용소. 정기룡 장군이 용소에서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임란 영웅 낳은 낙동강 최고 명승

매헌(사진)은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전란 동안 쌓은 전공이 혁혁한 점도 그렇지만, 그 업적에 대한 당대의 대우가 다른 장수들과 달라서다. 백성을 왜적의 총칼 아래 버려둔 채 일신의 안위를 찾아 피란하기에 급급했던 선조는 장수들의 전공을 제대로 평가하기는커녕 외려 깎아내리거나 역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기 일쑤였다. 혹여 민심이 이반해 권력을 잃을까 우려해서다. 그 때문에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은 역적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다 숨졌고, 이순신(1545~1598) 장군 역시 없는 죄를 추궁당하며 고문에 이어 백의종군까지 감수해야 하는 등 많은 장수가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매헌은 이와 달리 전공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승승장구하는 등 얼마 안 되는 성공한 장수로 기록됐다.

매헌 정기룡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해진 자료에서 확인되는 건 그가 무패의 명장인 데다 탁월한 목민관이란 사실이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홍양호(1724~1802)는 저서 '해동명장전'에서 매헌을 이같이 평했다. "크고 작은 60여 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정기룡이 가는 곳에는 한 명의 백성도 죽거나 다치지 않아 고을이 편안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의 이런 업적은 상당수가 상주에서 이뤄졌다. 하동 출신인 그가 상주와 함께 회자되는 건 그래서다.

매헌의 전승담과 치적을 한 번 살펴보자. "방어사 조경의 별장이 되어 거창에서 왜적 500명을 대패시켰다. 이어 금산에서 왜적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조경이 왜적에게 붙잡히자 공이 검을 휘두르며 적진에 들어가 그를 구해 돌아왔다." 송시열(1607~1689)이 쓴 매헌의 신도비에 나오는 내용이다. 삼국지에서 촉나라 장수 조자룡이 위나라 조조군을 돌파하고 유비의 아들 유선을 구출하는 것과 비슷하다. 매헌은 이 일이 알려지면서 '정자룡'이란 별명을 얻는다.

정기룡 장군 사당

상주성 탈환 승전담도 흥미롭다. "상주성에 웅거한 왜적 400여 명을 격살하고, 야간에 불로 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로로 매헌은 상주목사로 승진해 전란이 거의 끝날 때까지 재직했다.

당시 치적에서는 그의 자애로운 인품과 목민관으로서의 출중한 능력이 드러난다. "주민 중에 난을 일으킨 자들을 진압한 뒤 그들을 모아 둔전을 일궈 군량미를 지급하고 남은 곡식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으며, 그중에 날래고 건장한 자들을 뽑아 병사로 삼으니 모두 감동해 왜적을 만나기만 하면 앞다투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그 군사를 '감사군(敢死軍)'이라 했다." 송시열은 매헌의 전공과 치적을 열거한 뒤 "청렴결백하여 오점이 없었고, 항상 남의 곤궁한 처지를 나서서 도와주면서 자기의 사정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총평했다. 용맹과 지략, 덕성을 고루 갖춘 이상적인 지도자였던 셈이다.

■낙동강 물길 따라 흐르는 활인 정신

옥주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경천대 일대 풍경. 이경식 기자

매헌에 대한 이런 정보를 미리 파악한 뒤 지난 10일 경천대 기행에 나섰다. 경천대 일대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옥주봉(玉柱峰·163m)이다. 이 봉우리 위에 들어선 전망대에 오르면 예천에서 흘러온 낙동강이 울창한 솔숲을 머리에 인 깎아지른 벼랑을 타원형으로 굽이쳐 휘돌아가는 장관이 내려다보인다. 강 건너편에는 들판이 고즈넉이 펼쳐져 있다. 강 건너편에서 보면 옥주봉은 학이 강물을 마시고 날아오르는 형상이다. '옥주봉에 구름이 걷히니 주렴을 거둔 듯하고/붉은 벼랑에 햇살이 비치니 그림장막을 연 듯하네'. 17세기의 학자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1605~1646)는 옥주봉의 경치를 이렇게 묘사했다. 경천대 일대의 풍경은 한 편의 교향시를 연상케 한다. 교향시의 주제는 푸르름이다. 파란색 강과 진녹색 산, 연두색 들녘이 이 주제에 맞춰 변주하는 듯하다.

경천대

옥주봉 아래 강변에 20여 m 높이의 작은 암봉이 솟아 있다. 우담의 은거지인 경천대다. 그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호종했다. 경천대 위에는 우담이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로, 존명대의(尊明大義)를 밝힌 흔적이다.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의 새 주인이 된 후금을 계속 오랑캐로 규정한 채 망한 명나라를 받드는 환상에 사로잡힌 소중화(小中華)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국제정세 인식과 대처는 조선이 주체적 근대화의 힘을 키우지 못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경천대비

경천대에서 200m가량 떨어진 하류에는 '용소(龍沼)'가 있다. 실제 못은 아니지만 경천대와 용머리 형상의 암봉 사이에 벼랑이 반달처럼 굽어져 강물이 휘도는 까닭에 못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매헌이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용소에서 나온 용마가 건너편 백사장에서 뛰어노는 것을 발견한 매헌이 허수아비로 변장해 용마를 길들였다는 내용이다. 매헌은 금산 전투에서 조경을 구할 때도 용마를 타고 싸웠다고 한다. "신마(神馬)가 절벽을 오르고 험한 지형을 건너는 것을 마치 날카로운 발톱과 빠른 날개가 달린 것처럼 해내 공이 적을 제압하고 벗어나는 데 힘을 얻었다." 송시열도 매헌의 신도비에서 용마에 대해 언급했다.

용소로 가는 숲길

상주는 신라시대 9주의 반열에 올랐고, 고려 때는 12목의 하나였으며, 조선에 들어선 경주와 함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로 지칭할 만큼 큰 고장이다. 그런 상주의 중심에 경천대가 있다. 조령을 넘어온 육지의 물류가 경천대에서 낙동강으로 갈아타고 부산까지 이어진다. 그 물길을 따라 매헌처럼 우뚝한 활인(活人)의 지혜와 기개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 상주의 옛 왕국 사벌국 아시나요

- 고려시대 이전 건국설 분분
- 화달리 왕릉 등 유적 다수

상주에는 고려시대 이전 한때 '사벌국'이 세워졌다. 사벌면 화달리에 있는 직경 14.5~16m, 높이 4.5m 크기의 타원형 왕릉(사진)이 그 증거다. 왕릉 서편 신도비의 비문에는 상산 박 씨의 시조인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들 박언창이 917년 사벌군으로 책봉돼 있다가 후삼국 동란기에 사벌국을 건국했고, 이 능은 그의 묘소라고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주목 고적조에도 병풍산 아래 사벌국의 옛 성 옆 구릉에 사벌국 왕릉이 있다고 했는데,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벌국과 관련해선 10세기 초반 건국설 외에 신라 12대 왕인 첨해 이사금(재위 247∼261년)에 의한 병합설도 제기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한의 소국인 사벌국이 신라를 배반하고 백제에 귀속하자 첨해 이사금이 군대를 보내 토벌한 뒤 주를 설치했다. 상주에서 세형동검 등 청동기 유물이 다수 출토된 것을 미뤄 사벌국의 지배세력이 오랜 기간 독자적인 정치집단을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벌국 왕릉 왼편에는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보물 제117호)이 있다. 6.24m의 높이의 이 탑은 큰 돌 8개로 짜인 지대석 위에 축조됐다. 1층 몸돌이 솟아올라 상승감을 주는 게 눈에 띈다. 그러나 3층 지붕돌 위에는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다. 상층 기단 갑석 위에 머리가 떨어져 나간 불상 한 기가 올려져 있다. 나라와 정권이 무시로 바뀌는 험난한 세파에 던져졌던 백성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