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폭포. 내연산 12폭포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겸재의 '내연삼용추'에서는 맨 위 상폭으로 그려졌다.

- 영조, 원숙미가 절정에 다했던
- 58세의 겸재 포항에 내려 보내
- 진경산수화풍 완성하라는 배려

- 내연산의 잠룡·관음·연산 폭포와
- 기암절벽·협곡 등 화폭에 담아낸
-'내연삼용추' 직접 마주하는 시간

세상 끝까지 이어진 듯한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고나 할까. 지난겨울은 실로 혹독했다. 북극에서 하강한 미증유의 혹한은 한반도를 동토로 만들었다. 이대로 빙하기에 접어드는 게 아닌지 우려마저 일었다. 하나, 인생사가 그렇듯 자연사 또한 위기와 기회의 두 얼굴을 가진 것인가. 겨울은 우리의 참모습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죽비이기도 했다.

마침내 겨울 터널 끝에 한 줌 봄빛이 비쳤고, 그 빛은 사무치게 그리운 진경(眞景)을 드러냈다. 280여 년 전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도 그렇게 수도하듯 우리 산천의 속살로 다가가 '진경산수'의 세계를 발견했다. 경북 포항 내연산, 영양 석문입암, 서울 인왕산 등지로 '겸재 진경산수 기행'을 떠난다. 그곳에는 기운생동하는 새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강약·음양 조화 절묘

	내연삼용추- 겸재가 청하현감 재임시절 그렸다. 강과 약, 음과 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웅숭깊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1733년(영조 9) 6월, 탕평·개혁 군주인 영조는 겸재를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한 경상도 청하현(현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현감에 제수한다. 영일만 북쪽 동해변에 자리 잡은 한적한 소현인 이곳으로 겸재를 보낸 것은 자신의 그림 스승에 대한 배려이자 그곳에서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하라는 어명이었다. 그 당시 58세이던 겸재는 화가로서 원숙한 경지에 들어선 상태였다.

북악산 서쪽 기슭인 한양 북부 순화방 유란동(현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나고 자란 겸재는 어릴 적 인왕산과 북악산을 사생할 때부터 이미 그림에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어 30대 후반이던 1711, 12년 당대의 대학자인 스승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 진경시풍을 대성한 동학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과 함께 두 차례 금강산을 여행하며 터득한 그의 진경화풍은 20여 년의 이력이 쌓이면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그런 겸재가 동해변의 해악승지(海岳勝地)에서 2년 남짓 호시절을 보냈으니 어찌 절세의 진경산수화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그는 1734년 한 해 동안 물 만난 고기처럼 '내연삼용추(內延三龍湫)' '쌍계입암(雙溪立岩)' '성류굴(聖留窟)' 등 명작들을 쏟아냈다. 내연삼용추는 내연산 12폭포 중 네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인 '잠룡(潛龍)폭포' '관음(觀音)폭포' '연산(延山)폭포' 등 3곳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용추'는 폭포 아래 못을 말한다. 청하면에서 북쪽으로 4.4㎞가량 떨어진 송라면에 위치한 내연산은 해발 930m로 태백산맥의 줄기답게 산세가 자못 웅장하다.

	관음폭포 밑에 만들어진 못.

먼저, 겸재의 그림부터 보자. 화면에는 높이 수십~수백 m의 깎아지른 암벽이 빼곡하다. 암벽은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붓질하는 상악준(霜鍔皴)과 도끼로 나무를 쪼개거나 끌로 판 듯한 모습을 남기는 부벽준(斧劈皴)의 화법으로 표현했다. 가까운 암벽은 테두리를 짙게, 먼 것은 엷게 나타내 원근감을 주었다. 오른쪽 암벽 중턱에 나 있는 좁고 위태로운 벼랑길은 협곡 속으로 사라져 깊고 그윽한 느낌을 더한다.

계곡에는 세 폭포가 내리꽂히며 세찬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고 있다. 층층 탑을 쌓은 폭포들의 수직감은 산세의 험준한 인상을 배가한다. 해서, 마치 용이 암산 가운데를 뚫고 정상을 넘어 승천한 듯 골기가 하늘을 찌른다. 그림은 골기만 충천한 게 아니다. 붓을 옆으로 뉘어 쌀알이나 빗방울 같은 점을 찍는 미점법(米點法)과 우점준(雨點皴)으로 암봉의 숲과 암벽의 나무를 그려냈다. 숲과 나무는 암봉과 암벽의 골기를 부드럽게 감싸며 순화한다. 강과 약, 음(숲·폭포·계류)과 양(암벽·암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웅숭깊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림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과연 이런 기이한 절경이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앞선다. 중국의 여산이나 황산 같은 이국적 풍취가 물씬 풍겨서다. 산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겸재 자신의 의취(意趣)를 부각시킨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는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오해하는 위험한 선입견이다. 내연산에 한번 가 보라. 잔도 같은 벼랑길을 걷노라면 계곡의 풍경이 그림을 꼭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겸재는 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데만 충실하지는 않았다. 산수에서 받은 정감을 표출하느라 일부 경물을 키우거나 강조했다. 이는 그리는 대상의 영기를 담아내는 '전신(傳神) 화법'으로, 진경산수화의 화룡점정 구실을 하는 핵심요소이다.

■화혼 담긴 붓질

	12폭포 중 첫번째인 상생폭포.

내연삼용추의 예술성과 전신성을 체감하러 지난 16일 내연산을 찾았다. 602년(신라 진평왕 25) 창건된 천년고찰 보경사를 지나 계곡으로 진입하자 기마대군의 질주를 연상케 하는 칼바람이 기자를 맞이했다. 동트기 전 첫새벽이 가장 어둡듯이 봄을 눈앞에 둔 겨울은 마지막 광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그 기마대군은 패군에 불과했다. 수직 암벽과 암봉에 꿋꿋하게 뿌리 내린 소나무들의 푸른 바늘잎과 얼음이 녹아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는 임박한 봄을 웅변하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벼랑길을 500m가량 오르자 12폭포 중 첫 번째인 '상생(相生)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처럼 두 물줄기가 사이좋게 나란히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의 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25~1707)은 역작 '산중일기'에서 상생폭포를 '사자쌍폭'이라 불렀는데, 정면에서 가만히 살펴보니 몸을 웅크린 사자를 닮은 듯도 했다. 우담은 또 연산폭포와 관음폭포, 상생폭포를 상·중·하 삼폭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상생폭포의 왼쪽 아래에 암봉이 있는데, 그 위에서 춤추던 기녀가 실족해 떨어져 죽은 뒤 '기화대(妓花臺)'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상생폭포를 뒤로한 벼랑길은 오르내림을 되풀이했다. 그에 비례해 계곡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게 시조창의 유장한 가락을 떠올리게 했다. 내딛는 발걸음만큼 협곡은 깊어지고 기암절벽은 높이를 더해갔으며, 협곡에 드리워진 푸른 하늘도 좁아지고 아득해졌다. 상생폭포에서 1㎞가량 거리에는 '보현(普賢)폭포', 물길이 세 갈래인 '삼보(三洑)폭포', 용이 승천하기 전까지 못에 몸을 담갔다는 '잠룡폭포'가 줄지어 있다. 잠룡폭포 왼쪽에는 수백 m 높이의 암봉 '선일대(仙逸臺)'가 우뚝 솟아 있다. 신선이 올랐다가 선경에 취해 내려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연산폭포 암벽에 새겨진 겸재 각자. '정선 갑인추'라고 적혀 있다.

잠룡폭포 바로 위에 바람을 맞지 않는다는 '무풍(無風)폭포', 그 위에는 넓은 못을 지닌 관음폭포가 자리한다. 또 관음폭포 위엔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암봉 '비하대(飛下臺)'가 떡하니 직립해 있고, 양옆에는 수도처로 삼을 만한 3개의 굴이 뚫려 있다. 오른쪽 2개의 굴은 그 사이에 무소의 다리를 닮은 튼실한 기둥이 있어 비하대를 향해 달려가는 무소를 보는 듯하다. 비하대 위에는 300~400년 된 노송 한 그루가 자란다. '겸재송'이다. 관음폭포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12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큰 연산폭포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새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10여 m 높이의 폭포수는 장쾌한 직하와 우렁찬 소리가 장관이다.

연산폭포의 암벽에는 '정선 갑인추(鄭敾 甲寅秋)'라는 세로 두 줄의 각자가 있다. 겸재가 1734년 가을에 연산폭포를 답사했다는 뜻이다. 내연산 계곡이 선사한 가슴 벅찬 감동에 젖어 글을 새겼을 겸재가 눈에 어른거린다. 폭포 위에는 신선이 타고 온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암봉 '학소대(鶴巢臺)'가 치솟아 장장 2.5㎞에 달하는 연산폭포 아래 계곡의 섭리를 관장하는 듯 굽어보고 있다. 내연산 계곡은 보는 위치와 각도, 거리에 따라 감흥이 다 새롭다. 관음폭포와 무풍폭포 사이로 난 길은 선일대로 이어진다. 길이 500m가량의 벼랑에 달아맨 가파른 잔도로 선일대에 올라가 내려다본 수백 m 아래의 길고 깊은 계곡은 '용틀임'이었다. 겸재는 혼이 담긴 붓질로 그 용틀임을 화폭에 옮겨 진경을 펼쳐냈다. 그 진경은 우리의 찌든 일상을 정화하는 영혼의 단비로 다가온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