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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기행 <하> 남명의 제자들- 대소헌 조종도

나라 지키려 싸웠다, 정절 위해 몸 던졌다…산성 검붉게 물들 때까지

  • 이경식 기자
  •  |   입력 : 2016-02-03 19:21:23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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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 촘촘한 바위 능선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험준한 산세를 기반으로 정상부에 조성된 황석산성은 천혜의 요새다. 함양군청 제공
- 함양 황석산성으로 쳐들어온 왜적 비해
- 방어할 조선군은 150분의 1에 불과했다

- 농민·아녀자까지 가세해 싸웠지만
- 결국 대소헌과 장병 대다수가 순절

- 그 뒤 남편 따라 뛰어내린 여인들까지
- 죽음으로 나라 지킨 그들의 피 밴 듯
- 수백년 지난 지금도 산성 벼랑은 검붉다

"죽을 만한 장소를 얻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리요." 추호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결연히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1537~1597). 정유재란(1597년) 때 경남 함양군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황석산성에 입성하기 한 달여 전, 그는 병이 깊어 함양군수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새 군수가 부임하지 않았다며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 죽음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대소헌의 '행동하는 지성'은 스승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빼닮았다. 스승은 "백성을 두려워하라"는 임금에 대한 목숨 건 쓴소리로 민본(民本)의 주춧돌을 놓았다. 제자는 그 위에 쌓은 위민(爲民)의 성을 베개 삼고 옥쇄해 백성과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죽음으로 삶을 완성한 선비정신이었다. 대소헌의 선비정신을 좇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수성하다 죽는 것도 영화"

   
황암사 앞 대소헌 시비.
지난달 20일 오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1190m) 기슭에 자리 잡은 황암사(黃巖祠). 황석산성 수성에 나섰다가 순절한 장병과 백성 3500여 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 양옆엔 관련 사적비와 충혼비, 뒤에는 무연고자들의 시신을 합장한 의총(義塚)이 각각 조성돼 있다.

최근 새로 확장 개통된 광주대구고속도로를 타고 합천에서 함양으로 넘어올 때만 해도 약하게 흩뿌리던 눈발이 황암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사나운 눈보라로 돌변했다. 눈보라는 사당이 등을 기댄 황석산을 집어삼키고 사당과 주변 경물의 윤곽마저 지웠다.

그러나 대소헌 시비(詩碑)의 검은 글씨는 또렷했다. '공동산 밖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지만(崆峒山外生猶幸·공동산외생유행)/순원처럼 수성하다 죽는 것도 영화롭다네(巡遠城中死亦榮·순원성중사역영)'. '공동산'은 진시황이 신선을 찾던 곳이고, '순원'은 당나라 안록산의 난 때 성을 지키다 숨진 충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을 말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594년 단성현감 시절 대소헌이 창녕 악견산성을 지나며 지은 시다. 그는 이때 이미 왜적과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날의 한 맺힌 넋들을 위로하는 것일까. 솜뭉치인 양 몸을 불린 눈은 백열등처럼 허공에 새하얀 불을 밝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소헌이 56세 되던 해인 임진년(1592) 6월, 그는 동문인 송암(松巖) 이로(李魯·1544~1598)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금구현령 재임 중 모함을 받아 기축옥사(1589년·정여립 모반사건)에 얽혀 수감됐다가 풀려난 뒤 낙향해 있던 시절이었다.

"나라를 등지고 원수를 섬겨 평안할 수 있을 것인가? 관군은 흩어져 형벌을 겁내어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의병이 일어나면 충의심을 분발하여 다투어 나올 것이다." 그는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그 공로로 단성현감에 이어 함양군수를 제수받았지만 지병 때문에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정유년 7월 사임했다.

전란 중이라 후임자 임명이 늦어지자 대소헌은 군수직을 그대로 수행하며 당시 안음현감이었던 존재(存齋) 곽준(郭䞭·1551~1597)과 더불어 황석산성을 보수했다. 왜적의 재침에 대한 대비였다. 산성 보수 후 주변 고을의 수령과 군사, 백성들을 산성에 모아 수성군을 꾸렸다. 지도부는 대소헌과 존재, 거창좌수 유명개(劉名蓋·1548~1597),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생몰년 미상)이었고, 안음·합천·삼가·초계·함양·산음·거창 등 7개 군·현의 병력 500여 명과 백성 6000여 명을 포함한 7000여 명이 입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흘 격전…피로 물든 황석산성

   
대소헌 부인의 절의를 기린 쌍절각.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에 걸쳐 있는 황석산은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로 가는 요충지다. 사면이 수백 m 높이의 절벽인 산의 중심에 수많은 바위가 첩첩 쌓인 칼날 같은 암봉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다. 산 정상부에 조성된 산성은 높이 3m, 둘레 2.9㎞, 면적 44만6186㎡에 달한다.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험준한 산세 탓에 모두 접근하기가 어려운 천혜의 요새다.

서문은 대소헌, 남문은 존재, 북·동문은 백사림, 무기 등 군수물자 공급과 연락은 유 좌수가 맡아 수성에 들어갔다. 왜적은 정유년 8월 14, 15일 황석산성 아래 속속 도착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이끄는 7만5000여 명의 대군으로, 전라도 진격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風神秀吉)는 "전쟁이 이렇게 오래가는 것은 전라도민들의 저항이 가장 심해서"라며 "전라도로 진격해 도민들을 남김 없이 죽이라"고 명했다.

조선군은 정규병 기준으로 왜군의 150분의 1에 불과한 절대적 열세였다. 백성들은 주로 돌과 끓는 물·기름을 공급하는 데 동원됐다. 포탄과 화살이 떨어질 때를 대비하고 성으로 기어오르는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16일부터 시작됐다. 유명개연보와 대소헌문집 등 자료들에 따르면, 왜적은 이날 새벽 성 아래로 몰려와 겹겹이 둘러싸고 조총과 활을 쏘면서 맹공을 펼쳤다. 조를 나눠 대나무와 통나무를 엮어 만든 방패와 목책을 앞세워 함성을 지르고 사격하며 파도처럼 교대로 전진했다가 후퇴하는 모습이 성을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성중의 병사와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돼 거세게 저항하자, 왜적은 납치해 온 노인과 부녀자들을 내세워 "항복하면 살려주고 생업을 영위하게 할 것이니 투항하라"고 설득하거나 참수한 백성들의 머리를 쳐들고 "성을 비우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16, 17일 이틀간은 중과부적의 열세 속에서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잘 버텨냈다. 하지만 포탄과 화살은 물론 돌과 물·기름을 끓일 나무마저 동이 난 18일 새벽부터는 성이 함락될 위기가 고조됐다.

무기가 고갈된 사실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백성들이 성을 넘어 탈출하자 병사들도 뒤를 따랐다. 백사림의 한 부하는 20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왜적에게 투항했고, 그 사이에 백사림도 탈출했다. 너도나도 살겠다고 성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성문이 열리거나 일부 성벽이 무너졌고, 왜적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왜적은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성 안팎의 병사와 백성들을 마구 도륙했고, 살인 실적을 챙기느라 시신의 코도 베어냈다.

대소헌과 존재는 성안의 군기고 앞에서 왜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대소헌의 부인 전의 이 씨도 "의리상 혼자 살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존재의 두 아들과 큰딸, 사위 역시 순절했다. 유 좌수 또한 전투 중 전사했으며, 그의 부인도 남편의 뒤를 따랐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성밖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진 여인도 많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에 '성안에서 조선군 353명과 계곡에서 수천 명을 죽였다니 수고했다'는 글귀가 있는 것을 미루어 농성한 장병과 백성 대다수가 숨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역사상 가장 장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현장'이었다.

■농담 잘하는 외유내강 인물

   
황석산성 남문 성곽.
황석산성에는 아직도 그날의 상처가 남아 있다. 황석산 산행로 중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우전마을 코스로 오르면 사방댐과 너덜지대를 지나 수십 m 높이의 수직 벼랑에 이른다. 여인들이 투신했던 '피바위'다. 그 당시 여인들이 흘렸던 피가 배어 있는 듯 일부 표면이 검붉다. 이 바위 아래로 가로질러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면 남문이 나온다. 전투 도중 누각이 불타버린 남문은 지금도 덩그러니 성곽만 존재한다.

능선 위에 쌓은 성곽도 군데군데 허물어져 아귀지옥 같았던 그날의 혼란상을 떠올리게 한다. 성안 옛 군기고 터에는 대소헌과 존재가 왜적과 접전했던 너럭바위가 그대로 있다. 다른 산행 코스인 안의면 상원리 장수골 입구에서는 전투에 쓰려고 모아놓은 돌무더기를 볼 수 있다. 여인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성안으로 날랐다고 한다.

대소헌의 고향인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는 그의 부인 이 씨의 절의를 기리는 '쌍절각(雙節閣)'이 있다. 절의는 면면한 것인가. 그 건너편엔 고아한 정취가 돋보이는 '채미정(采薇亭)' '문풍루(聞風樓)'가 쌍절각과 짝하고 있다. 대소헌의 선조이자 생육신의 한 명인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가 세조의 단종 폐위에 반발해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뒤 평생 은거했던 정자와 누각이다.

'크게 웃는다'는 뜻의 자호에서 알 수 있듯이 대소헌은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해학을 잘하고 말할 때는 항상 웃었다. 외면은 질탕한 것 같이 보이나 내심은 지조가 굳어 녹록한 사람의 뒤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왜란 기록인 '징비록(懲毖錄)'을 지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대소헌을 외유내강의 인물로 평했다. 기축옥사로 투옥됐을 때 평소처럼 태연히 농담을 즐겨 "조 금구(당시 금구현령 재임 중)의 해학은 옥중인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대소헌을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든 껄껄 웃으며 타인의 구김살을 활짝 펴 줄 것 같은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절망을 희망으로, 비관을 낙관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 대소헌에게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인격을 본다. 이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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