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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기행 <중> 남명의 제자들- 내암 정인홍

정유재란 때 의병 일으킨 이는 62세의 내암뿐이었다

  • 이경식 기자
  •  |   입력 : 2016-01-27 19:06:22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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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에 자리한 부음정. 뒤편에는 정인홍을 배향한 청람사와 그의 신도비, 기념관 등이 있다.
- 학문 토론 위해 지은 '부음정'엔
- 내암을 보고파하는 젊은 선비 몰렸는데
- 이들이 왜란 후 기병의 핵심이 된다

- 전사한 외아들 죽음 슬퍼할 새도 없이
- 경상우도 의병을 총지휘하는 등
- 왜인을 소탕하고 보물을 지켜냈다

- 언제나 선봉에 서 나라를 구했던 내암
- 민생이 불안하면 나라가 온전치 않다는
- 그의 경고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 아닐까

"선비의 절조는 오직 출처 한 가지에 있을 따름이다." 병석의 스승은 제자에게 출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벼슬에 나아가면 반드시 하는 것이 있고, 물러나면 반드시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제자는 스승이 들려준 적 있는 원나라 유학자 허형의 말을 떠올리곤 스승의 당부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 우리 사상사의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과 그의 수제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 남명이 타계하기 20여 일 전 두 사람이 함께했던 장면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늘 차고 다니던 칼을 물려줬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內明者敬·내명자경), 밖으로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의(外斷者義·외단자의)'라는 글을 새긴 '경의검'이다. 심법(心法)의 전수였다. 그 이후 내암의 삶은 그 심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내내 의병장으로 구국의 선봉에 섰고, 전후에는 임금의 거듭된 벼슬 제수를 모두 고사한 채 인조반정이 일어나 처형될 때까지 산림처사로서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민족사학의 태두인 단재 신채호(1880~1936)는 내암의 외적 방어와 정치적 경륜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우리 역사의 3대 위인으로 꼽았다. 내암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실천의 전범으로 내세운 셈이다. 지난 20일, 내암의 자취를 찾아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경남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로 여행을 떠났다.

■호연지기를 마시다

   
정인홍의 사촌 동생 4명을 배향한 가남정.
내암은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 아래 남사촌(현 가야면 황산리)에서 태어났다. 생가터는 지금 논밭으로 변했다. 생가터 바로 옆에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서 발원한 가야천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천공사 등 각종 개발로 옛 모습을 잃었지만, 그래도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 하천가에 하나 남아 있다. 내암이 직접 썼다는 '송천대(松川臺)'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다. 400여 년의 풍상 속에 많이 마모되긴 했지만 반듯한 필치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이 느껴졌다. 가야면사무소 이병재 부면장은 "내암 선생이 한가할 때 송천대에 앉아 낚시도 즐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내암은 45세 되던 해인 1580년(선조 13), 생가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부음정(孚飮亭)'이라 이름 지었다. '술을 마심에 믿음이 있으면 허물이 없다(有孚于飮酒無咎)'는 주역 미제괘의 효사에서 따온 것이다. 내암은 이 이름에 음주가 아닌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성현의 글을 읽고 지난날의 훌륭한 언행을 알며, 절친한 벗들이 찾아와 서로 학문을 면려하는 것이 마시는 밑천이다. 산에 걸친 구름, 물에 뜬 달, 흐리고 개는 변화하는 모양은 마실 때의 안주이다.…술을 마신다는 건 누룩으로 빚은 술에 의해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게 아니다."(부음정기) 대자연 속에서 지기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을 갈고닦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이야기다.

   
조식이 정인홍에게 물려준 경의검.
부음정에는 내암에게 배우고자 하는 젊은 선비가 몰려들었다. 7년 전 초야의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는 선조의 명으로 벼슬길에 나선 뒤 황간현감과 영천군수를 거쳐 사헌부 장령에 제수돼 엄정한 일 처리로 '산림장령'이란 명성을 얻었던 영향이었다. 선조실록에 '정인홍은 비리를 탄핵하는 데 있어서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국법을 엄수해 일시에 기강이 자못 숙연해졌다'고 당시 분위기가 기록돼 있다. 부음정에 모인 선비들은 왜란 발발 후 창의 기병의 핵심 자원이 됐다.

부음정은 현재 가야천 건너 야천리로 옮겨져 있다. 부음정 뒤편에는 내암을 배향한 사당 '청람사(晴嵐祠)'와 문집·경의검을 비롯한 각종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 내암의 신도비,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오르면 상왕봉과 매화산의 수려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매화산은 천 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듯해 '천불산'으로도 불린다. 부음정을 찾은 날, 매화산은 눈을 이고 성큼 다가와 순백의 화두를 꺼내 들었다. "물러서지 마라. 진리는 시리고 차갑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내암도 눈 내린 겨울날 아침, 매화산이 발산하는 호연지기를 가슴 시리게 마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낙동강 지킨 최후의 의병장

   
내암집.
1592년 5월, 내암은 합천군 숭산면(현 가야면 매안리 일원)에서 30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내암이 손자에게 남긴 글을 보면, 당시 왜군은 영산 창녕 현풍 무계 성주 개령 김산을 거쳐 호서 지방으로 들어가 아래위로 퍼져 있었고, 낙동강에는 김해부터 상주까지 왜선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특히 현풍과 성주 사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무계에는 왜군 수천 명이 진을 친 채 점거하는 바람에 강의 좌우가 단절돼 있었다. 의병은 가장 먼저 기병한 곽재우가 의령, 김면은 거창, 전치원과 이대기는 초계, 김응성은 고령, 문려와 이홍우 등은 성주의 한쪽을 각각 지키고 있었다.

경상우도 의병들을 총지휘하는 영남의병도대장(嶺南義兵都大將)을 맡은 내암은 그해 6월 고령과 성주의 군대와 합세해 무계의 적진을 기습해 적을 소탕하고 군량과 보물 저장고를 불태워 버렸다. 첫 승리였다. 얼마 후 낙동강 하류로 내려온 적을 마수원(황강과 낙동강 합류지점, 현 창녕군 유어면 부곡리)까지 쫓아가 8척의 배에 타고 있던 적을 섬멸했다. 이어 안언역(현 성주군 용암면) 옆에 복병을 둬 올라오는 적을 요격해 거의 전멸시키고 우마 140여 두를 포함한 다량의 군수품을 노획했다. "이 세 번의 전투로 적병은 낙동강을 오르내릴 수 없고, 현풍에서 초계로 오갈 수도 없게 됐다." 내암은 전과를 담담하게 적었지만 그 의의는 실로 대단했다. 왜군의 낙동강 보급선을 차단하고 호남 침투를 저지한 것은 물론 왜인들이 손에 넣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안전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는 내암의 큰 희생이 뒤따랐다. 그를 따라 참전한 외아들이 전장에서 병사한 것이다. "작년에 네가 아들을 잃고 금년에 내가 너를 잃었으니 부자간의 정은 네가 먼저 알았구나. 너의 장례는 내가 치른다만 나의 장례는 누가 치르겠느냐. 너의 죽음에 내가 곡을 하지만 나의 죽음엔 누가 곡을 하겠느냐. 늙은이 통곡하니 청산이 찢어지려 하는구나." 내암이 쓴 아들의 제문에는 눈물이 흥건하다. 그럼에도 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62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창의했다. 명나라 장수들은 이런 그를 보고 "전란의 최고 수훈자"라고 평가했다.

의병에는 내암의 아들뿐만 아니라 사촌 동생들도 가담했다. 부음정에서 3㎞가량 떨어진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에 가면 '가남정(伽南亭)'이란 재사(齋舍)가 있다. 정인기(鄭仁耆)·인함(仁涵)·인휘(仁徽)·인지(仁止) 4형제의 의병활동을 기려 배향한 곳이다. 이들 형제는 임란 당시 내암의 휘하에서 왜적과 싸웠다. 재사 옆에 자라는 느티나무가 눈길을 끈다. 높이 20m에 둘레가 5.6m에 이르는 나무는 수령이 450년으로 추정된다. 재사 옆으로 휘돌아가는 가야천의 경관 또한 이 나무와 어우러져 자못 범상치 않은 기품을 자아냈다.

■"백성이 편안하면 적이 침범 못해"

   
정인홍이 쓴 '송천대' 글씨.
의병장 활약 못지않게 내암이 주목받는 점은 또 있다. 왜란이란 미증유의 국가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안이다. "권간(權奸)이 백성의 재물을 배로 운반하고 말로 실어 날라 탐욕을 채우고 자신을 살찌우려는 욕망을 만족시키니 백성들의 목숨이 어찌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익은 권세 있는 집에 돌아가고 원망은 나라에 떠넘기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요행입니다.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 같은 용감한 기세를 떨쳐 개혁하지 않으면 결코 나라가 잘 다스려질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지배계층의 부패와 타락에서 왜란의 원인을 찾는다.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 임금에게 올린 좌찬성 사직상소에서다.

그리고 내암은 백성을 보호하고 생업을 마련하는 '보민제산론(保民制産論)'을 도탄에 빠진 나라를 회생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닦는 근본대안으로 개진한다.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견고하면 적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니, 이웃 적국 입장에서 말하면 오를 수 없는 자연의 요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번다하고 무거운 부역의 부담을 덜어주고,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백성을 대신해 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높은 대가를 받아내는 방납(防納)의 폐해를 바로잡는 게 급선무라고 그는 주장했다. 내암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광해군 때부터 대동법이 시행된다.

내암은 광해군 시절에만 대사헌에서 영의정에 이르는 주요 벼슬들을 제수받지만 고향 합천에 은거하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이 당시 조정에는 그의 정치적 대리인인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암의 그런 '산림정치'가 화근이었을까. 이이첨이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날조해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내암은 상소 등을 통해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을 낳은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데 반대했지만 사태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종결되고 말았다.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 내암은 88세의 나이로 '폐모살제의 배후 조종자'라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1908년 복권될 때까지 285년간 '패륜 역적'의 굴레를 쓴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에도 내암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단재처럼 '구국의 정치가'라는 극찬이 있는가 하면, '권력의 화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들 평가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중요한 건 불행히도 근대의 길목에서 내암의 경고가 그대로 현실화됐다는 사실이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보민제산'에 실패했고, 그 결과 주체적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해 임란 발발 318년 만에 나라를 잃었다. 다시 생각하면 내암의 경고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적 이치다. 민생이 불안한데 어찌 나라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해서,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서 진정 뼈아픈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상식 파괴로 인한 불행은 미래에도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을. 이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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