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 감정의 선은 넘지만
- 행동의 선은 넘지 않는
- 절제된 연기 선보인 그

- "영화제에 상영되는 영화는
- 관객이 평가하는 것이다"
- BIFF 사태에 쓴소리 전해

여섯 살이던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한 안성기는 성인 배우로 돌아온 1980년 이후 한국 영화사의 중심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긴 세월 모범적인 배우 생활을 하며 가장 아름다운 주름을 지닌 배우로 존경받는 그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다룬 '화장'으로 오는 9일 관객과 만난다.

'취화선' 이후 임권택 감독과 13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자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화장'은 죽어가는 아내와 연정을 품은 젊은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평소 많은 책을 읽는 안성기는 "예전부터 이상문학상 수상집 전편을 즐겨 읽는 편이다. 김 작가의 '화장'은 10년 전쯤 읽었는데,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느낌을 지녔다. 영화로 만들면 진짜로 깔끔한 멋진 작품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다"며 '화장'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는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임 감독님이기에 영화화가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절제돼서 한 편의 영화가 나왔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화장'에서 안성기는 화장품 회사의 임원이자 투병 중인 아내(김호정)를 간호하는 남편 오 상무 역을 맡았다. 아내가 처절하게 죽음과 사투를 벌일수록 오 상무는 회사의 젊은 직원 추은주(김규리)의 싱그러운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오 상무를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다양한 감정이 농축된 상태에서 시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안성기는 "다른 영화들은 한 장면을 찍으면 쉬면서 농담도 하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게 안됐다. 부인은 죽어가고, 자신은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통받고, 임원으로 중요한 결정도 해야 하는 인물이니 그 감정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코미디 영화 찍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며 연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털어놨다. 힘들게 촬영한 만큼 스크린 속 그의 연기는 빛을 발한다. 특히 영화 중반 해운대 모텔촌을 방황하듯 걸어가는 장면은 백미다. "그 장면 찍을 때도 느낌이 좋더라. 억지로 오는 감정이 아닌 자연스럽게 내재해 있던 것이 스멀스멀 나오는 감정이 좋았다."

	영화 '화장'의 한 장면.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오 상무였기에 싱그러운 젊음을 지닌 추은주에게 끌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 상무는 감정의 선은 넘지만, 행동의 선은 넘지 않는다. "오 상무는 어떤 행위를 하기에는 절제가 된 사람이라 상상 속에서만 추은주를 만난다. 아내가 죽은 후 추은주가 별장에 찾아왔을 때 거기서조차 외면한다. 죽은 아내가 택배로 보낸 사진과 와인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소중함이 확 솟아난다. 그 속에 추은주라는 사람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이다."

'화장'에서 오 상무의 아내 역으로 열연을 보여준 김호정의 연기도 화제다. 오 상무가 아내를 간호하는 화장실 장면에서 전라 노출한 것은 현실감을 극대화했다. 안성기는 "애초 상반신과 얼굴만 찍는 것이었는데, 임 감독님이 이건 아닌 것 같다며 몇 시간 고민하고 김호정 씨에게 이야기해서 다시 찍었다. 장면 자체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하고 그 고통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며 촬영 당시를 설명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BIFF) 부집행위원장인 안성기는부산시와 갈등을 빚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생각도 전했다. "영화제에 상영되는 영화는 제어할 수 없고, 관객이 평가하는 것이다. 세계 영화제가 모두 그렇게 하고 있는데, 사전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부산시에서 조금 더 아량을 갖고 포용을 해줬으면 한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사퇴까지 가면 안 된다" 그는 또 "BIFF의 발전은 부산 시민의 영화에 대한 사랑과 부산시의 협조가 있어서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손잡고 잘 해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영화계의 어른이자 '국민배우'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안성기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 죽음의 화장과 생기의 화장사이 중년남자의 삶

- 김훈 소설 최초 영화화

	영화 '화장'으로 만난 안성기, 임권택 감독, 김훈 작가(왼쪽부터).

'화장'은 한국 문단의 정점에 선 김훈 작가,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 국민배우 안성기 주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기대를 모은다. 특히 김 작가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은 '화장'이 최초라 더욱 의미가 깊다.

단편소설 '화장'은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김 작가의 '화장'은 모든 소멸해 가는 것과 소생하는 것 사이에서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의미를 냉혹하고 정밀하게 추구한 작품으로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게 더 많은 소설"이라는 김 작가의 자평처럼 '화장'은 반대되는 것들의 다른 듯 같은 두 얼굴을 포착한다. 두 여자를 사랑하는 남성의 심리를 세련되게 표현했는데, 시신을 불태우는 '화장'(火葬)과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이라는 이중적 소재의 배합으로 젊은 여자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생명과 한순간에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통해 생과 사를 오롯이 한 그릇에 담았다.

임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김 선생의 문장이 주는 엄청난 힘과 박진감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은 굉장히 해볼 만하다"며 도전의식을 드러냈다. 더불어 "나는 지금 김 선생이 만들어낸 '화장'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 지금부터 내 색깔을 드러내고 찾아내며, 또 김훈 선생이 담아낸 깊은 작품 세계 안으로 저 자신도 깊숙이 잘 들어갈 것이다"라는 자신감도 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