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하나 딸 둘을 키우는 후배가 세 아이를 데리고 놀러 나갔다가 위급한 상황 속에서 황급히 아들의 손을 먼저 이끌었노라 고백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다섯. 결코 아들 선호사상에 젖어 있을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서운해하는 딸아이에게 두고 두고 뒷소리를 들었다면서 결코 진심이 아니었음을 하소연했다.

아이들이 셋이나 되다 보니 위급상황에 그저 가까이에 있는 아이의 손을 이끌었을 뿐인데 우연히 그것이 아들의 손이었다는 것이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억울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해하고도 남을 그 일을 두고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식을 두고 깨물어 아프지 않을 손가락이 어디 있을까만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대놓고 아들을 챙겨 아픈 손가락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를 샀다. 어쩌면 그것은 그 시절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6대 종손인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특별한 맏아들이었다. 등교준비에 바쁜 아침시간. 별다르게 거들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시누이의 등교 준비는 빨랐다. 야무진 딸과 눈치 없는 아들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다른 법. 딸아이가 오빠를 제치고 먼저 대문을 여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시어머님은 준비를 다 끝낸 시누이에게 트집을 잡아 주저앉힌 뒤 묶은 머리를 서너 번씩 다시 풀었다가 묶어주며 큰아들이 먼저 나서도록 등교시간을 벌어주었노라 하셨다. 또한 현관에 놓인 신발을 정리할 때도 딸보다 아들 신발이 한 뼘이라도 더 앞쪽에 놓이도록 정리하셨다고 하니 그 시절 아들에 대한 어머니들의 사랑은 너나없이 유난했던 것 같다. 그나마 신여성을 표방하셨던 시어머님의 차별은 마음속으로 이어졌지만 나의 친정어머니는 드러내놓고 아들을 우대하셨다. 어린 시절, 제일 억울했던 일은 라면을 끓여서 오빠의 방까지 대령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빠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볼멘소리를 내놓았다가는 엄마에게 된서리를 맞아야 했으므로 말 못하는 억울함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요즘, 나이든 오빠는 어디를 가나 능력 있는 여성들이 많아 기죽은 남자들이 넘쳐난다고 엄살을 떤다. 아들 둘을 키우는 내게도 딸이 없어 어쩌느냐는 연민의 시선들이 자주 와 닿는다. 달라져도 많이 달라진 세상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대한민국의 아들 선호 사상이 이렇게 옅어진 것만 보더라도 세상사 바꾸지 못할 고정관념은 없겠다 싶어진다. 빗자루 한번 잡아보지 않으신 아버지 곁에서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오신 어머니들은 며느리를 멀쩡히 두고도 방청소를 도맡아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달라진 세상을 실감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필요한 묵은 것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것들을 담아보는 용기야말로 새해를 맞은 이즘에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어진다. 위기 속에서 잡아끈 손이 아들이었든 딸이었든 그건 더는 중요하지 않다. 달라진 세상에 박자를 맞춰 기꺼이 함께 가는 일. 우리들의 특별한 새해가 시작되고 있다.

유정임 FM 90.5 부산영어방송 편성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