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의 전역 후 첫 작품으로 기대를 모은 '역린'이 베일을 벗었다. '역린'은 1777년 7월 28일, 정조 1년에 일어난 '정유역변'이 소재다. '정유역변'은 정조의 서고이자 침소였던 경희궁 존현각에 정체 모를 자객이 침입했던 사건. 영화는 정유역변이 일어나기 전 24시간을 시간 순서대로 그린다.

영화 속 시간은 24시간이지만 영화가 담는 내용은 그 이상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세자 시절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정조(현빈)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여기에 정조 할아버지인 영조의 젊은 계비로 노론 수장인 정순왕후(한지민)의 야심, 정순왕후로부터 정조를 지키려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가 한 줄기를 이룬다. 또 하나의 줄기는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한 상책(정재영)과 조선 최고의 살인청부업자 살수(조정석)가 겪은 어린 시절 이야기다. 당시 노론과 소론으로 얽힌 정치판이나 살수와 궁녀 월혜(정은채)의 로맨스는 곁가지처럼 흐른다.

'역린'은 135분이라는 상영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인물과 사건을 설명하려는 욕심 탓에 대사가 많고 이야기의 중심마저 흔들린다. 정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겪은 드라마틱한 인간사나 당시 정치판의 난맥상을 보여주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상책과 살수를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뤄야 했을까.

영화를 24시간으로 나눠 진행한 것은 그만큼 긴장감을 주기 위함이었을 텐데, 자주 과거로 돌아가는 바람에 느슨한 느낌마저 든다. 특히 클라이맥스가 정조를 내버려둔 채 상책과 살수의 이야기로 전이되는 부분은 너무도 아쉽다.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를 연출한 이재규 감독은 자신의 영화 데뷔작인 '역린'에 너무 많은 것을 넣으려 했다.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은 많았겠지만 영화는 16부작 미니시리즈가 아니라는 사실을 촬영 전부터 마음에 뒀어야 했다.

한편 기대를 모았던 현빈은 시작부터 존현각에서 웃통을 벗어젖힌 채 등근육을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뽐낸다. 내적 갈등이 심했던 정조의 미세한 감정 표현에는 성공했지만, '이게 최선입니까?'라는 물음표는 남는다. 정순왕후 역의 한지민은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사 톤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 제목 '역린'은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뜻하는 말로, 왕의 약점을 건드려 노여움을 사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다. 개봉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