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기자 wylee@kookje.co.kr

- 8개월 사이 무려 5편 영화 촬영·개봉 이어져
- 옆집 아저씨부터 강한 캐릭터까지 다 소화
- '방황하는 칼날'서 감정적으로 힘든 신 많아
- '역린'서는 왕 보필 내관 역 맡아 현빈과 호흡

지난해 9월 '우리 선희'를 시작으로 11월 '열한시', 올 1월 '플랜맨'에 이어 4월 '방황하는 칼날'(10일)과 '역린'(30일)까지 8개월 사이에 무려 다섯 편의 영화로 관객과 만나는 배우가 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영화를 촬영했을까'. 정재영은 "'우리 선희'는 몇 회 만에 촬영을 끝냈고, 다른 영화들은 간혹 맞물린 경우가 있다. '열한시' '방황하는 칼날' '플랜맨' '역린'의 순서대로 촬영했는데, 아주 바쁘게 찍은 것은 아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말했다.

정재영은 이들 영화에서 모두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순박한 옆집 아저씨처럼 선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면 금세 강한 인상의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정재영이기에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장르도 다르고…. 그렇게 안 했으면 욕도 먹고 그랬을 것이다. 많이 한다는 것보다 마구잡이로 출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지난 10일 개봉한 '방황하는 칼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죽인 소년을 살해한 아버지는 정당한가'라는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에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고 있다. 정재영은 "사법적으로 무죄이나 도덕적으로 유죄인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다. 사법적으로 심판을 못 받으면 도덕적인 심판을 통해 그것을 응징하는 방법도 있고, 사법적으로 유죄인데 도덕적인 재판으로 감형할 장치를 시대와 흐름에 맞게 보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재영은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사랑하는 딸이 18세 소년들에게 성폭행당하다가 죽임을 당해 아픔을 겪는 아버지를 연기했다. "예전에 설경구 선배의 '그놈 목소리'를 보면서 이미 납치당한 애가 잘못됐다는 것을 관객은 알고 있는데, 주인공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며 "이번 영화도 감정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또한 '방황하는 칼날'은 겨울 산에서 눈밭 촬영을 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았다. 이와 관련 정재영은 "나야 투정이라도 부릴 수 있지만, 스태프들은 더욱 힘들었다. 중요한 점은 그냥 힘들게 촬영한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힘든 일이 보는 사람의 감정으로 연결되고, 인물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행복하다"고 연기파 배우다운 이야기를 건넸다.

정재영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과 관련된 상반된 영화에 출연한 바 있다. '강철중:공공의 적 1-1'에서는 비행청소년을 조폭으로 조직화하는 그룹의 회장 역을 맡았고, '글러브'에서는 청각장애 청소년 야구단을 이끌었다. 그는 "청소년 문제는 아무래도 민감하다. 그만큼 어른의 시각으로 보면 청소년은 이제 곧 어른이 되기 때문에 올바른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재영은 오는 30일 개봉하는 '역린'에서는 왕의 서고를 관리하는 내관으로 정조를 보필하는 상책 역으로 출연한다. '역린'은 암살 위협을 느끼는 정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궁중 암투를 다룬 영화로, 현빈의 군 제대 이후 첫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정재영은 "현빈을 만나기 전에도 성실하고 남자답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나이에 해병대에 지원한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나서 이야기하고, 술도 한잔 하면서 봤더니 점잖고 어른스러웠다. 내가 지금 현빈의 나이 때는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지금의 나보다도 철이 들어 있었다"며 속 깊은 현빈을 칭찬했다.

정재영은 최근 몇 개월 동안 급행열차를 타고 달린 기분이다. 지금은 텅 빈 상태다. 그것이 그를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최근까지 들어온 작품이 없다며 "좋은 작품이 생기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으니까 막연히 기대한다"고 말했다. 잠시 휴식을 하지만 충무로가 그를 긴 시간 동안 가만히 두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선악의 양날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배우가 흔치 않으니 말이다.


# 일본 최고 대중·미스터리 소설가

■ 원작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눈밭에서 촬영한 '방황하는 칼날'의 한 장면. 정재영은 "힘들게 촬영한 만큼 보는 사람에게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방황하는 칼날'의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최고의 대중소설 및 미스터리 소설 작가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1985년 '방과후'로 제3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작가로 데뷔한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으로 꼽히고 있다. 1999년 '비밀'로 제5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고,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제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는 사회의 정곡을 찌르는 문제 제기를 통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27편의 드라마와 11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난 10일 개봉한 '방황하는 칼날'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작품을 영화화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설에서 선명한 비판의식으로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물었다면, 이정호 감독의 '방황하는 칼날'은 이야기 전반을 아우르는 사회의 보편적인 모순점을 짚어내며 더 폭넓은 소통을 시도한다.

"원작 소설을 접하고 아버지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이 감독은 영화화를 결심한 이후 7년간의 준비 끝에 '방황하는 칼날'을 완성했다. 이 감독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한 아버지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 범죄에 대한 원작의 시선은 잃지 않으면서 '자식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슬픔'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미했다. 또한, 살인자가 된 아버지를 쫓으며 직업윤리와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형사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란 질문을 던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