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는 무척 개성적인 데뷔작이었다. 요즘은 워낙 많은 저예산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장르영화를 표방하는 작품들도 많아졌지만, 그 시절만 해도 독립영화라면 당연히 예술영화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작품성도 뛰어났지만, 당구장 액션장면 등으로 더 주목받았다. 당시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웬만한 액션영화들보다 액션에 대한 이해가 훨씬 높았던 것이다. 스스로 '성룡 키드'라 말했던 류승완은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짝패' 등 '액션'에 방점이 찍힌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류승완이 단지 액션 장면만을 잘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류승완의 영화에는 소위 '양아치'의 기운이 잘 살아 있었다. 사회의 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처절함, 분노, 해학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 잘 배어 있었던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맨날 당구치고 싸움만 하고 다니는 고등학생들도 어느새 성장해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면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이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어른들의 싸움은 결국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돈이나 '짝패'의 복수 혹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것들을 지키기 위한 발악이 된다. 한국 사회의 상층으로 무대를 넓힌 '부당거래'가 좋았던 이유는, 검사와 경찰이라는 '권력 집단'이 양아치로 전락했을 때 드러내는 추잡한 이전투구와 발악을 신랄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점에서 '베를린'이 궁금했다. 이야기도, 액션도 잘 꾸미는 류승완이 첩보액션물인 '베를린'을 어떤 흐름으로 끌어갔을지 보고 싶었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후 뒤숭숭한 베를린의 북한 대사관. 북한 요원인 표종성은 자신의 아내 연정희가 반역자로 의심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북에서 파견된 동명수는 표종성의 충성까지 의심하고, 북한 대사관을 감시하던 국정원 요원 정진수는 그 사건의 배후에 커다란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전형적인 첩보영화의 스토리다. '베를린'은 근래 첩보영화의 걸작에 등극한 '제이슨 본' 시리즈와 스탈린 시대 비밀경찰의 고뇌를 그린 톰 롭 스미스의 스릴러 소설 '차일드 44'에서 많은 것을 차용한다. 물론 빌려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액션도, 아내를 의심하며 자신의 충성심을 당에 증명해야만 하는 남자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변주할 수 있다.
'베를린'은 어느 정도 아귀가 맞는 이야기를, 류승완의 장기인 액션을 살려 잘 꾸며낸 첩보물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심심했다. 모든 것이 적당하게 흘러갈 뿐 강약이 없다. 아내를 의심했다가 고난을 극복하면서 다시 화해하는 표종성에게 동조해야 할까? 정권 교체기에 자신의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양으로 삼는 비정한 '권력'을 비난해야 하는 것일까? 난데없이 복수를 위한 '제이슨 본'의 짝퉁이 되려는 마지막 장면은 어찌 된 것일까? '베를린'은 첩보영화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골라 놓고, 그냥 적재적소에 뿌려놓은 듯한 느낌이다. 베를린까지 갔는데 '베를린'이라는 공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면도 거의 없다. 잘 만들었는데 감흥이 오지를 않는다.
'베를린'을 보고 있으면 요즘 한국 상업영화들이 왜 심심해졌는지 알 것만 같다. 필요한 설정과 장면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캐릭터를 끼워 넣는다. 장면들을 흥미롭게 꾸미는 데 주력하는 반면 캐릭터는 밋밋하고, 그들의 고뇌와 결정은 지극히 단순하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라 코드에 맞춰 움직이는 로봇 같다. 잘 만들었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는 영화. 그런데 뭔가 가슴 깊이 다가오지는 않는 영화. '베를린'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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