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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찬영의 한방 이야기] 노년기 화병은 ‘인생 2막’ 시작의 신호

  • 권찬영 동의대부속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진료과장
  •  |   입력 : 2023-05-22 18:59:18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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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후반 여성 A 씨는 3명의 자녀를 둔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얼마 전에는 막내딸까지 시집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는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가슴과 머리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답답해졌다. 또한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머리도 지끈지끈거린다.

집에 있으면 괜히 화도 나고, ‘여태까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하는 공허감마저 든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그동안 무리해 몸이 쇠약해진 것이라며 집에서 좀 쉬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쉬어도 몸은 좀처럼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다. A 씨는 여기저기 병원을 다니며 검사란 검사를 다 받았지만, 검사결과에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뚜렷한 병명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필자의 진료실을 찾아온 A 씨에게 내린 진단명은 화병(火病)이었다. 화병은 울홧병의 준말이다.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지 못해 화의 양상으로 폭발하는 증상이 있는 증후군을 의미한다. 이 같은 화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다음과 같다. 가슴 답답함, 열감, 치밀어 오름, 목이나 명치에 뭉쳐진 덩어리, 억울하고 분함, 마음 속 응어리나 한(恨) 등이 그것이다. A 씨는 이 같은 화병의 모든 진단기준을 충족한 상태였다.

정신과적인 면담 결과, A 씨는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한평생을 살아왔는데 정작 자신을 위해 살아갈 기회를 놓쳐온 것으로 보였다. 그때마다 발생했던 억울함과 분함이 해소되지 않고 쌓이다 보니, 이제 화병으로 화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A 씨는 항상 포기하며 살아온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해 병까지 생겼으니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했다. 이처럼 화(火)는 해소되지 않고 쌓이면 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불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화를 바르게 사용한다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A 씨에게 화병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설명을 드렸다. 무엇 때문에 분하고 억울한지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놓치면서 살아왔던 귀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방에서는 화병처럼 울화(鬱火)로 인한 병에 대해, 소화기로 불을 끄는 것처럼 소화(消火)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소(解消)하는 것을 상책으로 본다. 이에 따라 A 씨에게는 울체된 기(氣)를 해소하는 명약인 시호소간탕(柴胡疏肝湯)을 처방하고, 침 치료를 시행했다. 시호소간탕은 간기울결(肝氣鬱結)이라고 하는, 주로 분노와 감정을 해소하지 못해 가슴 답답함 억울감 두통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발생할 때 사용하는 한약이다. 여기에다 상담을 통해 그동안 A 씨 자신이 가정을 위해 포기하며 살아왔던 것을 돌이켜보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것을 함께 찾아보았다. 노년기 화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동안 쌓여있던 화를 하나씩 풀어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질문은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따라서 노년기 화병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한 신호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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