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8월의 중추지월(中秋之月)은 가을의 가운데라는 의미로 달빛이 가장 좋은 날이다. 최근 출근 준비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체크무늬 넥타이는 수년 전 한가위를 앞두고 진료한 50대 아주머니를 문득 떠올리게 했다. 항문 관련 전문병원은 한가위 즈음이면 환자들로 북적인다. 빡빡한 직장생활 탓에 짬을 낼 수 없었던 장삼이사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 연휴에 몰리기 때문이다. 이 아주머니는 전업주부로 예외였다.

당시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어기적거리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항문 주변에 밤톨만 한 치질이 활짝 피어있고 그 주위가 퉁퉁 부어 있었다. 당장 수술을 하자고 권유했지만 잠시 뜸을 들이더니 도저히 수술할 형편이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서럽게 엉엉 울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30여 년간 시집살이를 하느라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둘째 며느리이지만 손윗동서가 시부모를 모실 형편이 안 돼 자기가 어른들을 모시고 일 년에 대여섯 번씩 기제사도 모셨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편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결국 이번 한가위를 앞두고 그간 묵혀두었던 치질이 추석 장을 보는 등 며칠 바짝 고생을 하다 보니 밖으로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이처럼 심한 치질을 감돈(嵌頓) 치질이라 표현한다. 감돈 치질은 기존의 잠재하던 치질이 밖으로 빠지면서 퉁퉁 붓고 혈액순환 장애로 인해 본래의 위치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이다. 심할 경우 괴사가 되기도 하여 염증도 생기고 때론 혈관이 터져 피가 나기도 한다.

이 아주머니의 경우 통증도 통증이거니와 피가 나 팬티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같은 남자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은근히 화가 나 다음날 남편과 시어머니도 함께 오시라 했다. 환부 사진을 보여주며 도저히 이 상태에선 추석 준비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남편은 좀 가라앉힌 후 추석을 쇠고 수술을 해 달라고 하자 옆에 있던 시어머니가 아들을 야단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리곤 며느리 손을 잡으며 "내가 아직 잘 움직일 수 있고 큰 아이 불러 일을 같이 할 테니 너는 수술하고 추석을 병원에서 쉬거라"하며 달랬다.

결국 추석 연휴 전날 아주머니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푹 쉬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회진을 가니 아들 딸 시어머니 남편 등 온 가족이 와르르 몰려와 아주머니를 둘러싸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치질이었기에 망정이지….

연휴가 끝나고 통원 치료를 위해 내원한 아주머니는 근사하게 포장된 넥타이 선물을 들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원장님 덕분에 악성 치질도 해결하고 내 생애 제일 행복한 추석을 보냈답니다. 감사합니다." 그 다음 주 아주머니가 방문하는 날을 맞춰 나는 그 멋진 넥타이를 매고 진료를 시작했다.

황성환 부산항운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