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유엔(UN)데이에 방송할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느라 올 봄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탈북자들을 만났다. 달라도 크게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듯 재정리되면서 한핏줄을 나눈 민족임을 새록새록 실감한 한 해 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들을 알아가니 깊은 관심이 생겼고 관심 없던 그들의 남한살이에 따뜻한 눈길이 갔다. 이즈음 언론매체에서 들려오는 북한 뉴스가 이제 더 이상 '강 건너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다르지만 결코 다르지 않은 그들과 마주하며 종종 깨우치지 못하고 있던 일들을 새삼 깨닫게 된 소중한 일들도 많았다.

북한 군인 출신의 한 여성이 들려준 화장품 에피소드는 오래도록 기억이 났다. 이미 북한 내부 깊숙이 유행하고 있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화장품의 가치에 대해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군인이었던 그 여성도 남한 사회에 발을 들인 이후 여자가 되고 싶었단다. 흔히 하는 말로 '블링블링' '샤방샤방' 분위기를 내고 싶어 처음으로 화장품 가게를 찾은 날. 휘황찬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이것저것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걸 찾으시나요?" 부드러운 말투의 친절한 인사.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쏟아지는 제품 설명들. "아이라인? 아. 섀도우? 아니면 볼터치? 메이크업 베이스 찾으세요? 이건 어떠세요? 피부가 노말한 타입이시네요. 그렇다면 약간 오일리한 에멀젼도 좋겠어요. 올해 메이크업 콘셉트는 펄 느낌이 강한 스모키 메이크업이 유행 코드고요. 파운데이션은 리퀴드 타입이 파우더 타입보다 잘 어울리겠어요. 컨실러는 이게 베스트셀러고요. 요즘 그랜드 세일 중인데, 혹시 멤버십 회원이신가요? 카드 주시면 포인트 적립 도와드리고요. 마일리지도 체크해 드릴까요?"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이야기에 멍하니 서서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듣다보니 알아들은 한국어가 몇마디 없더라나! 종종 들려오는 조사나 술어 두어 마디가 알아들은 전부였단다. 그냥 그렇게 황급히 화장품 가게를 빠져나오며 여기가 한국이 맞나 싶었다는 이야기에 당시에는 깔깔 웃고 말았는데, 정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두어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이 정작 그 속에 안주하다 보면 느낌없이 지나치게 된다. 이후로 나는 종종 생각을 한다.

어쩌다 젊은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 메뉴판을 들여다보기가 겁날 지경이다. 외국어 일색의 메뉴판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방송에 등장하는 요즘 가수들은 가수이름인지 노래제목인지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로 가득한데 가사도 영어가 많다. 커피 한 잔 주문할 때도 제품명이며 사이즈며 샷 추가 방법까지 각양각색의 외국어가 가득해 그냥 늘 마신던 것만 마시고 만다.

하물며 오늘 아침 회사의 프린터기까지 나에게 영어를 권하고 있다. 문제가 생겨 조그만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니 거기도 영어다. 용지가 들어있는 카셋트를 다시 끼워보라거나 토너를 교체하라거나 프린터기는 영어로 명령을 내리고 있다.

하기사 회식에서도 자연스럽게 '치얼스'를 외쳐대는 일상들이나 누군가의 이야기에 '좋아'라고 대꾸하기 전에 습관처럼 '오케이'를 남발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나 있는 건지 정말 '아이 돈 노우'다.

유정임 부산영어방송 편성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