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미경으로도 잘 안보이지만 위액 속에서 살아남는 독한 균
- 위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 사람 타액으로 전염될 수 있어…찌개 함께 먹는 식습관 탓, 우리 국민 60%가 감염
- 암 걱정되면 제균치료
어떤 질환이나 병을 불러오는 매개체가 위험성의 정도와는 별개로, 다른 이유로 인해 '유명세'를 타는 사례가 종종 있다. 대개 특정 사건과 맞물려 있거나 광고 등을 통해 지명도를 얻는 경우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헬리코박터균)'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균은 한 회사의 기능성 음료 광고로 인해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 균이 인체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위장질환의 주범
헬리코박터는 위의 점막표면에서 사는 균이다. 길이가 2~7㎛, 너비가 0.4~1.2㎛에 불과해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위 속의 위액은 질긴 고기를 분해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산성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웬만한 균은 위 속에서 살지 못한다.
하지만 헬리코박터균은 알칼리성의 암모니아를 만든 뒤 이를 바탕으로 주위환경을 중화시키는 '우레아제(urease)'라는 효소를 분비할 수 있어 위 속에서도 살아 남는다.
헬리코박터균은 고대 인류의 미라에서도 발견될만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반면 그 정체가 밝혀진 것은 얼마전이다. 1982년 와렌과 마샬 박사가 처음으로 존재를 확인했다.
위에 기생하고 있는 이 균은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위암 등 여러가지 위장질환의 주범이다. 의학계에서는 위궤양의 70%, 십이지장궤양의 30~60%가 헬리코박터균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보통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은 각각 6~8주, 4~6주가량 약물치료를 하면 완치가 된다. 그렇지만 충실하게 약물로 질환을 다스렸음에도 차도가 없다면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감염을 생각해봐야 한다.
헬리코박터균은 위염을 불러오고 이를 더 악화시키는데도 관여를 한다. 사실 위염 자체는 큰 질환이 아니다. 인체의 위는 다양한 음식물들을 소화하고 섭취하는 과정에서 세균과 곰팡이류, 화학적 자극 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가벼운 염증의 발생과 치유가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또 이러한 외부의 유해한 자극을 막아내는 자체 방어 기전도 갖고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거나 여러가지 원인에 의해 이런 방어기전이 망가지면 표재성 위염, 위축성 위염, 장상피화생 등 만성 위염이 생기게 된다. 이 가운데 위축성 위염과 장상피화생은 전암성 병변으로, 위암이 생길 수 있는 확률이 높다. 헬리코박터균은 위질환이 악화되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위암의 원인인자로 헬리코박터균을 규정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위암은 현재 우리나라 3대 암 가운데 하나다.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질환에는 기능성 소화장애도 있다. 급성 위염이나 궤양 등의 소견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복통이나 복부불쾌감, 소화 불량 등의 증상을 호소한다면 헬리코박터균이 그 원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제균을 할 때는 신중히
헬리코박터균은 저개발국에서는 인구의 70%에서 발견될만큼 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헬리코박터균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전 국민의 60% 가량이 이 균에 감염되어 있다는 통계도 나왔다. 이는 맵고 짠 음식을 즐기고, 서로 나눠 먹는 우리의 식습관과도 관계가 있다. 헬리코박터균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것이 정설인데 찌개 같은 것을 여러 사람이 같이 먹게 될 때 숟가락에 묻는 타액을 통해 전염이 될 수도 있다.
이 균의 감염 여부는 침습적 진단과 비침습적 진단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비침습적 진단에는 대변검사와 요소호기 검사(헬리코박터균이 가지고 있는 요소분해효소를 이용하는 방법) 등이 포함되고, 침습적 진단에는 내시경 조직 검사를 통한 CLO 테스트, 헬리코박터균 배양, 혈청 검사 등이 있다.
헬리코박터균이 확인됐다면 다음 단계로 제균(균을 없애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의료계에서도 제균에 대해 아직 확실한 결론은 없는 상태다. 헬리코박터균을 보유했다고 해서 반드시 위암에 걸린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 원칙적으로 제균치료는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이 있는 경우, 위암을 치료한 환자 등에 국한된다.
제균치료는 일반적으로 3~4가지 약제를 이용해 1주에서 2주 정도에 걸쳐 실시된다. 대개 2가지 이상의 항생제와 제산제가 동원된다. 이 균은 내성율이 높기 때문에 약을 빠트리지않고 잘 복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제균치료 때는 환자가 상복부 불쾌감이나 구역질, 구토, 복통, 설사 등의 증세를 호소하는 수가 많다. 치료가 끝난 뒤 약 복용을 중단하면 대개 증상이 해소되지만 만성적인 설사를 하는 위막성 대장염이나 약에 대한 알러지 등이 생기면 정밀진단을 해야 한다. 제균이 됐다고 해서 안심해서도 안된다. 헬리코박터균은 워낙 내성이 강해 치료를 받은 환자의 2% 정도는 재감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약 처방 후 균이 완전히 사라졌는지를 살피는 추적검사를 반드시 해야만 뒤탈이 없다.
도움말=김진호 안락항운병원 내과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