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광신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이도 있고 하니 닭 허벅지나 뜯으며 근엄한 자세로 텔레비전을 전세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퇴근길부터 꼬였다. '아빠. 오늘 명품경기는 사직아시아드에서, 어때?' 뽕, 하고 떠오르는 문자. 내 인생의 자식농사 완결편인 딸아이의 문자를 그냥 씹을 수는 없었다. 해서 부드럽게, '붉은밤'은 가족끼리. '닭튀김 가족'도 함께 하면 더 좋지. 답장을 보내자 회신 왈, 다른 집 아빠의 말은 심금을 울리는데 누구의 말은 약만 올리는군요!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딸아이마저 악마가 되어버렸다는 얘긴가. 세상에 그 무지막지하게 순수하던 아이마저 월드컵이 집어삼키다니! 집은 더 가관이었다. 아내 또한 어디서 묵혀 두었던 무늬도 조잡한 붉은 상의를 꺼내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악마가 되어 가는 자식을 보호해야 할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야?"

"요즘 유행어가 뭔지 알아요? 사랑은 강요할 순 없지만 응원은 강요할 수 있다! 딸내미도 원하고 하니깐 우리 사직에 가요, 네?"

코맹맹이 소리까지 양념삼아 섞어가며 말했다. 아내는 집요했다. 눈물까지 마중나올 정도로. 아내의 말을 듣고 있자니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사람이 많다고 코피야 쏟겠는가.

"좋아, 까짓 거 오늘은 메이커 있는 남편 구실을 한 번 해보지 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내는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내랴, 먹을 음식을 싸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아이를 태우고 축구공처럼 또르르 굴러 경기장에 도착하니 이건 뭔가. 경기장 전체가 순식간에 입장 금지구역이 되어 있었다. 8만 명이 다 찼으므로 야구장으로 가란다. 그때, 사람들이 아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거기에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굳게 닫힌 셔터를 '인간매미'가 되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딸아이의 확고한 표정을 보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는 '불량노인' 동아리가 있다니 '불량남편' 동아리 시샵이 되는 연습이라도 하는 셈치지 뭐.

팔뚝까지 긁혀가며 경기장에 들어서자 눈이 순식간에 물레방아처럼 돌아가고 말았다. 붉은 악마들의 응원소리. 손이 잔 파도처럼 와르르 일어나는 응원바다의 풍경에 놀랄 일도 없던 가슴마저 둥둥거리기 시작했다. 물결에 꽃봉오리 일렁이듯 살아 푸들거리는 스탠드. 사람 하나하나가 붉은 연꽃봉오리 그 자체였다. 그런 광경을 보는 순간 마치 나의 조국애가 죄 사함을 받은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응원가를 합창하고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기를 몇 번.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경기 흐름에 따라 터지는 함성과 한숨소리들. 그러나 어느 순간, 퍽 하고 깨지는 소리들, 한숨은 순식간에 경기장을 뒤덮었다. 사람들의 입은 닫힌 서랍처럼 열릴 줄 몰랐다. 갑자기 눈에 이는 저 붉은 안색과 붉은 눈빛들. 이를 어쩌나. 경기야 이기고 질 수 있는 거지만 눈앞에서 그물망을 출렁이는 토고의 선제골은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살과 살 사이에 번개라도 숨겨두고 있었는지 우르릉거리기 시작하는 관중석! 베컴보다 더 멋지게 프리킥을 한 이천수. 곡선을 그리며 상대방의 그물에 꽂히는 순간 응원 볼륨은 최대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응원에 보답하기라도 하듯이 다시 이어지는 안정환의 날카로운 슈팅! 순간적으로 막혔던 가슴이 확 뚫리는 극도의 쾌감! 안 그래도 날씨마저 너무 일찍 친절해서 짜증스러운 나날이 아니었던가. 증명사진처럼 앉았다가 돌아올 계획이야 무너져도 좋았다. 아. 이 크나큰 세계적 기쁨! 우리 가족의 행복처방전까지도 경기장에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함성을 질러댔다. 둥근 공, 저게 온 국민을 아교처럼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힘을 지니다니.

돌아오는 길에 기쁨에 취해 자동차들이 빠빠빠-빵빵! 하고 울릴 때, 딸아이가 운전을 방해하며 클랙슨을 눌러도 마냥 기분 좋았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