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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사냥의 시간’ 장르도 없고 작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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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5-20 19:30:57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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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의 시간’(2020)의 오프닝을 보면서 처음에는 감독 윤성현이 뭔가 야심 찬 걸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인물의 동선과 시점을 따라가며 비추는 풍경들, 몇 개의 컷만으로 제시되는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비록 영화가 현재를 배경으로 하지 않더라도, 가공의 미래를 우회해서 다시 현재의 한국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지 않을까 내리 짐작했던 것이다. 기대는 5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코로나19 유행의 악재로 극장에 걸리지 못한 채 넷플릭스로 간 이 영화는 한 감독의 작품보다는, 오늘날 한국영화의 실상을 비추는 표본으로서나 의미 있어 보인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근미래의 우울한 세계를 설정으로 깔았을 때 영화는 환경오염과 슬럼화, 불안한 치안과 정치상황 등을 통한 상투적인 수사에 그치더라도 관객의 현재를 겨냥한 일말의 정치적 메시지를 제시해야 했다. 만약 정상적인 연출이었다면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2011)의 청춘들이 ‘아키라’(1988)의 폭주족처럼 사이버펑크의 세계로 떨어진 청춘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자본과 기술적 세공력을 들여 조형해낸 미래의 한국은 활극의 배경으로 스쳐 지나갈 뿐, 만듦새에 걸맞은 사회적, 철학적 함의를 갖지 못한다. 인물 간의 드라마를 대폭 생략한 결과는 감정선의 부자연스러운 변화와 상투적인 신파로 돌아왔다. 극 중 인물들은 한국을 떠나고자 하지만, 정작 탈출을 원하는 그들의 동기는 거듭 ‘지옥’을 운운하는 대사만큼이나 관념적이고 현실감이 없다.

도박장의 판돈을 털 계획을 모의하면서 강탈영화의 전형성을 따르던 영화는, 중반을 넘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무지막지한 킬러에게 추격당하는 과정을 그리는 액션 스릴러로 돌변한다. 그러나 영화가 자아내야 할 서스펜스와 몰입감은 제한 시간과 추격자가 있음에도 여유롭게 행동하는 주인공, 당장 목표를 처치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놓아주는 킬러 등, 현실감과 핍진성을 해치는 장면들이 삽입되면서 무너지고 만다. ‘사냥의 시간’은 장르의 혼성모방이 아니라 혼란이다. 작가적 관점이 결여된 빈자리를 윤성현은 장르의 컨벤션을 끌어모아 채우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서 류승완은 액션의 분량을 늘어뜨리며 극의 흐름을 끊어먹었을지언정 강탈영화의 서사적 틀에는 충실했다. ‘살인의 추억’(2003)은 군사정권기 한국의 사회상을 겨냥하지만, 그러한 맥락을 제외하고도 영화는 한 편의 장르 스릴러로서 훌륭하게 기능한다. 이 두 작품은 데뷔를 치르고 본격적으로 충무로에 뛰어든 신인 감독들이 상업 영화 장르의 공식을 이해한 바탕에서 그만의 작가적 구도를 만들어나간 두 번째 영화들이다. 반면 ‘사냥의 시간’에서 윤성현은 장르의 완성도와 작가의 심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총체적 난국에 봉착하고 만다.

   
탄탄한 웰메이드 장르영화가 눈에 띄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상업영화 전선에 뛰어든 독립영화 감독들은 각자의 개성을 잃은 채 소모적이고 관습적인 영화제작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르도 없고 작가도 없었다. 남은 건 공허한 이미지의 허영과 상투적인 레퍼토리의 성찬일 뿐. ‘사냥의 시간’은 한국 상업영화가 처해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품이 됐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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