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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3일 부산 중구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에서 조광수 박사가 ‘부산 언론의 전성기, 양대 주필 시대’를 강연하고 있다. |
- 조광수 前이병주 연구회장 강연
“누구에게나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이 활짝 피듯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있습니다.” 조광수 박사가 강연을 이어갔다. 그는 영산대 교수를 지낸 정치사상가이며 전 나림 이병주 연구회 회장이다. “부산 언론도 화영연화가 있었습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부산의 양대 신문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과 부산일보의 언론을 이병주와 황용주가 주도하던 시절입니다. 이른바 ‘양대 주필 시대’입니다.”
지난 13일 부산 중구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에서 ‘개항 150주년 기념 인문 콘서트-부산의 길을 묻다’ 일곱 번째 강연이 열렸다. ‘부산 언론의 전성기, 양대 주필 시대’가 제목이었다. 이 인문 콘서트는 부산근현대역사관이 기획한 2026년 회심의 프로그램이다. 지난 4월 시작해 오는 8월 29일 이해인 수녀·시인 강연까지 15강이다. 부산이 개항한 뒤 150년에 걸쳐 이룬 것, 현재 가진 자산과 부채를 바탕으로 미래를 열어갈 길을 묻는다는 취지다.
이날 주제가 특별했던 데는 분야가 ‘언론’이라는 점의 비중이 컸다. 역사 인문 예술 문화 IT 건축 관광 등에서 부산의 길을 많이 물었지만, 언론 부문에서 지역의 미래 담론을 모색한 시도는 좀체 없었다. 언론 관점에서 접근하자 곧장 재발견돼 시민 앞에 제시된 내용이 ‘양대 주필 시대’다. ‘황용주: 그와 박정희 시대’ ‘이병주 평전’ 등을 쓴 석학 안경환 서울대 로스쿨 명예교수가 이미 ‘양대 주필 시대’라는 개념 규정을 했으나, 부산의 대중 강연에서 이 제목이 전면에 나온 건 사실상 처음이다.
같은 시기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이병주(1921~1992)와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황용주(1918~2001)는 평생의 깊은 친구이기도 했다. “원래 국제신문 주필이던 황용주는 1958년 9월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초빙됩니다. 김지태 당시 부산일보 사장은 황용주에게 사택을 제공하면서 월급을 50만 환을 지급합니다. 당시 서울 5인 가구 한 달 생계비가 10만 환이었습니다.”
조 박사는 “황용주가 빠진 자리에 국제신문이 초빙한 주필 겸 편집국장이 이병주”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부산 언론계에서는 용호상박의 총력전이 펼쳐진다. “부산이 6·25 한국전쟁 1023일 동안 임시수도였던 시기 두 지역신문이 한국 언론의 중심 구실을 하며 정점으로 치달았다가 1953년 서울 환도 뒤 성장세가 정체하던 때였습니다.”
예컨대 두 신문의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월 혁명 보도는 부산을 다시 한번 대한민국 담론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이병주 주필이 이끈 국제신문은 가장 먼저 취재진을 2차에 걸쳐 마산 현지에 급파합니다.” 진압 경찰에 폭행을 당해가며 목숨 걸고 취재한 기사는 질과 양에서 최고봉을 선보이며 민주주의 보도의 정점을 보여준다. 조 박사는 “황용주 주필이 이끈 부산일보는 김주열 열사 사진을 특종 보도한 뒤 이를 국내 다른 언론과 외신에 제공해 4월 혁명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소개했다. 결국, 4월 혁명은 세상에 더 널리 알려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두 주필은 군사정권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다른 길을 걷는다. 이병주는 작가의 길을 걷고, 황용주는 언론 현장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부산의 길을 묻는 인문 콘서트로는 드물게 언론 부문을 다룬 이날 강연은 진행자 오성은 소설가(세명대 교수)의 말대로 “미래를 통찰하려는 자리”이기도 했다. 조 박사는 “부산은 타지에서 온 이병주와 황용주를 품은 ‘열린 도시’였다”고 강조했다. 또한 “인문의 힘이 충만했던 시절, 박력 있게 부산을 이끈 ‘사람(인재)’이 있었음을 기억하자”고 했다. 다시없을 ‘양대 주필 시대’를 통해, 도시를 위한 ‘인사이트(통찰)’를 모색한 인상 깊은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