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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학살의 현장과 아름다운 중세도시가 공존하는 나라…평화가 더 절실해졌다

역사·문화·예술 체험 ‘폴란드 방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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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도심에 자리한 바벨성의 풍경이 아늑하고 고풍스럽다. 조봉권 기자
지난 2월 22~28일, 6박 7일간 폴란드에 다녀왔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2월 28일,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하루만 늦었다면, 귀국 비행기 편이 전쟁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실제로 그즈음 전쟁 여파로 중동 주요 공항에서 많은 승객의 발이 묶였다. 별안간 전쟁이 터지고 보니, 엄두가 안 나 ‘해외여행’ 기사는 일단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폴란드 여행 기록’을 품고만 있자니,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발효했다. 폴란드는 외세에 의해 평화가 독하게 깨진 경험이 많다. ‘지도에서 지워졌던 나라’. 폴란드 역사를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표현이다. 외세의 분할 점령으로 1795년부터 123년간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1918년 독립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소련 치하에 들어가며 1939~1945년 다시 사라진다. 폴란드 역사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 ‘파티션(partition)’이다. (외세의 침략에 따른) 분할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폴란드는 평화를 향한 염원이 유난히 강한 나라다. 여행 정보를 상세히 전하는 여행기에 앞서, 평화를 키워드로 한 폴란드 방문기를 써보고자 했다.


◇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의 환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도심에 있다. 접근성이 좋은 덕인지 관람객이 엄청나게 많았다. ‘폴란드 한 달 살기’(조대현 지음·해시태그 펴냄·2024)라는 여행 책자는 이곳을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역사 속 실제 항쟁인 1944년 바르샤바 봉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전하는 슬픔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고 인간을 압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8월 1일 시작한 봉기는 63일 만인 10월 2일 처절하게 패배한다. 폴란드 저항군은 나치 독일군을 몰아내고 자주를 쟁취하고자 목숨 걸고 봉기했다. 도울 수 있었던 소련군이 바르샤바 코앞에서 수수방관한 사이 저항군은 대패한다. 저항군 1만6000여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0만 명이 학살됐다(2015년 폴란드 영화 ‘바르샤바 1944’ 참조). 이 박물관 전시 구성은 관람객을 압도하는 생생함과 성실함을 담았다.

여기서 뜻밖의 환대를 받았다. 박물관 안내인이 다가오더니 일행이 들고 있던 에코백에 적힌 글귀가 무슨 뜻인지 물어왔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에서 파는 그 에코백에는 대선소주 사진과 함께 ‘마! 대선 무라 - 대선, 니 삐다’라는 부산말이 인쇄돼 있었다. 말뜻을 설명하자, 그는 갑자기 “따라오라!”고 했다. 잡혀가는 줄 알았다. 뭐가 잘못됐나?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한 그는 친절한 태도로 특별한 안내를 베풀었다.

그는 “한국과 폴란드 역사는 닮은 데가 많다고 들었다. 여기는 한국의 전쟁박물관 관계자와 육군 수뇌부도 다녀갔다”고 소개하더니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기념 배지를 선물해 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것은 분명 특별한 환대였다.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애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집단·강제 수용소 박물관 외관. 아래 사진은 나치 독일이 학살한 수많은 유대인이 현장에 남긴 신발을 모아 만든 전시물이다. 조봉권 기자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역사·문화·관광의 중심인 도시가 크라쿠프다. 크라쿠프에서 1시간 거리에 오시비엥침이 있다. 오시비엥침을 독일어식으로 읽으면 ‘아우슈비츠’다. 거기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집단수용소 유적이 있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영원히 잊히지 않고 씻지도 못할 대학살의 비극이 눈을 뜨고 방문객을 바라보는 곳이다. 크라쿠프에 여행 왔다가 이곳에 가보지 않기란 어려웠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집단수용소는 늦은 오후 시간대를 제외하면, 개별 자유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단체 투어 일원이 돼야 관람할 수 있고, 가이드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폴란드어로 제공됐다. 오전 11시15분 영어 가이드 투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잊지 못할 ‘가이드 할머니’를 만났다. 끌려와 학살된 수백만 유대인이 남긴 신발 무더기, 밥그릇 무더기, 샤워실(가스실) 등은 투어에서 특히 견디기 어려운 구간이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해요. 왜 그들은 그토록 무자비하게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왜 그랬는지.” 가이드 할머니의 낮고 맑고 또렷한 안내에는 높은 지성과 깊은 슬픔이 함께 묻어났다. 끔찍한 학살 현장인 가스실을 돌 때 그가 말했다. “내 친척 두 분도 여기서 희생됐습니다.” 희생자의 유족인 가이드 할머니는 분향공간에서 조용히 분향했다. 애도하던 그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크라쿠프에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여행하려면 하루 정도 별도로 시간을 빼야 한다. 예약과 관람 방식 정보도 충분히 알아보고 가기를 권한다.


◇ 평화·조화·친절: 크라쿠프와 바벨성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 오른쪽 큰 건물이 날마다 트럼펫 연주가 이뤄지는 성 마리아 성당이다. 조봉권 기자
중세 문명의 귀한 유산이 도심 곳곳에 넘치도록 풍성한 크라쿠프는 도시 풍경에 여유가 스며 있다. ‘동화풍’이라고 할 만한 요소도 자꾸 마주쳤다. 호텔 32 크라쿠프 올드 타운이라는 작은 호텔의 꼭대기 층에 묵었는데, 천장이 유리여서 하늘이 보였다. 크라쿠프 최고 명소 바벨성에 가니 불을 뿜는 용의 전설이 살아서 활보하고 있었다.

크라쿠프는 11세기부터 폴란드 왕국 수도였다. 긴 세월 문화·예술·학술·종교의 성취를 축적했다. 2차 대전 때 바르샤바는 90% 이상 철저히 파괴됐다. 반면, 크라쿠프는 폭격당하지 않았다. 그 간발의 평화 덕에 도시가 보존됐다. 크라쿠프 여행 출발지는 중앙시장 광장(리네크 글로브니)이다. 이 광장에 성 마리아 성당이 있다. 높이와 건축 양식이 각각 다른 거대한 고딕 건물의 한쪽에서 날마다 트럼펫 연주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를 중심으로 가볼 곳이 많은데 그중 ‘크라쿠프 역사박물관’을 강력히 추천한다. 박물관이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 마녀와 예언자 이야기부터 정식 역사까지 전시물을 생기 넘치게 채웠다. 부산이 배울 만한 박물관이라고 느꼈다.

바벨성은 크라쿠프의 이 많은 매력을 집약한 곳이다. 도심의 비스와 강변을 걷다 문득 바벨성의 실루엣을 발견하는 첫 순간이 오게 마련인데 그 신비한 기분은 크라쿠프 여행의 백미다. 바벨성은 수백 년에 걸친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공존하는 조화의 아름다움이 깊고 귀하다.

바르샤바에서 고속열차로 크라쿠프까지 2시간 반 남짓 걸렸다. 다만, 임박해 표를 구하니 비용은 만만찮다. 주중 편도 기준 1인당 6만~7만 원에 달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에서 왕궁과 인어공주 동상, 쇼팽의 심장이 묻힌 성 십자가 교회 등 명소를 보고 제법 큰 서점에 들어가 책을 살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82년생 김지영’ 영문판이 반가웠다. 한강 작가 작품 번역본은 안 보여 궁금했다. 폴란드는 예술·문화·역사·인문 자원이 풍부한데 물가는 아직 덜 비싼 중유럽의 좋은 여행지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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