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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알렉산드리아’에 서린 詩心 두고 나림과 노정필 격론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42> 어느 황제의 회상 ‘겨울밤’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11-09 19:07:16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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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속에 무심했던 장기수 노정필
- 20년을 ‘혼자만의 황제’로 살아

- 서대문교도소 함께 지내던 나림
- 수차례 말 건넸지만 침묵 일관
- 남로당 숙청 주제로 대화 물꼬

- 노 “기록 되려면 시와 결별해야”
- 이 “詩心이 스며야 설득력 가져”

권력이 없는 황제는 행복할까. 절해고도에서 황제 나폴레옹은 위신을 지켰을까. 황제다운 고독을 오만하게 침묵으로 감추며 장엄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황제라는 환각만으로 황제는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 착각을 신념으로 오인하고 있는 폐인은 아닐까.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있는 옥사 사진이다. 나림이 1974년 쓴 작품 ‘겨울밤’에는 이곳이 서대문교도소라는 이름으로 중요하게 등장한다. 출처=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홈페이지
과연 감옥의 장기수는 근엄하게 혼자만의 황제를 꿈꿀 수 있을까. 나림 이병주는 고통스러운 영어(囹圄) 생활을 황제에 빙의하여 그 환각으로 버텼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하늘 아래 어느 누구이고 황제 아닌 사람이 있을까만 대개 경우 사람은 감옥에 유폐되어서만 스스로가 황제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의 운명을 인류의 운명과 결부해 명상하는 황제다운 습성은 감옥이란 궁전에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 번거로운 생활의 늪에 분실해 버린 역사상 자기 좌표는 고독하게 갇혀야만 되찾게 되는 것이다.

나림은 자신보다 더 황제연(皇帝然) 하는 인물을 만난다. 제왕학을 철저하게 익힌, 아예 말이 없는 황제다. 말이 없는 정도를 넘어 삼불주의(三不主義) 불견(不見) 불청(不聽) 불언(不言)을 실천하며 산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 아랫것들의 소란, 특히 정치나 사상 이야기에 무심하다. 치사스러운 세속의 일은 속인들에게 맡겨버리고 황제로서 의연함을 견지할 뿐이다. 꼬박 20년을 징역 살다 나온 노정필이다.

■바위 같고 황제 같았던 남자

나림이 노정필에게 전해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북의 시인’. 오른쪽은 나림의 1974년 작품 ‘겨울밤’.
노정필은 나림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이다. 만석꾼의 자제로 일본에 유학했고 사상운동을 하다 해방 후 고향의 건준 인민위원장, 그리고 6·25 때 인민군 치하의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3·15 부정 선거로 수감된 전 진주경찰서 서장이 노정필을 알아보고, 주위의 청으로 봐주려 했으나 워낙 확신범이어서 방법이 없었다는 앞뒤 사정을 같은 방에 있는 나림에게 상세히 알려준다. 한미(寒微)했던 청년 시절 유학생에 대한 묘한 대항심으로 노정필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 영어 문제를 일부러 물어본 경험도 이야기한다. 교사들도 쩔쩔매던 문제를 수월하게 풀어주는 실력과 겸손한 태도에 심복(心服)했다는 것이다. 정치범을 수용하는 서대문 교도소 제 삼사 팔십여 개 감방엔 당시 삼백여 명 정치범이 도합 오천여 년의 징역을 안고 유폐되어 있었다. 노정필은 나림이 출감하고도 10년을 더 살다 나왔다.

나림은 노정필의 제왕학의 내용을 알고 싶어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동좌(同坐)할 기회를 만든다. 온갖 유도 기술을 다 동원했으나 다섯 차례까지는 “절대적인 벽 앞에 다물어버린 입”을 여는 데 실패했다. 여섯 번째 자리에서 갖은 학자 문인 이름을 열거하며 혹시 지인 없냐고 집요하게 물은 끝에 “이원조 하고는 대학 예과 동기였소” 하는 말을 들었다. 이원조는 월북 시인이다. 이육사의 동생으로, 퇴계의 14대손이다. 나림은 “김일성이 그 사람을 죽인지 오래됐소”라고 답한다. 노정필은 분노에 격한 어조로 “거짓말 마시오” “그런 말 마시오”라고 할 뿐이다. 과연 황제가 함직한 말이다. 황제는 설명할 필요도 없고 부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명령하고 부정하면 그만이다.

나림은 다음 자리에 마쓰모토 세이초가 쓴 ‘북의 시인’을 갖다준다. 그 책은 임화를 모델로 한 소설로 대체로 허구이지만 말미의 재판기록은 실제 자료다. 그 기록엔 이원조를 포함하여 월북 문인 대부분이 남로당 숙청 때 처형된 사실이 수록돼 있다. 일주일 후 뜻밖에도 노정필이 나림을 찾아왔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서재를 둘러보고, ‘북의 시인’을 가리키며 “이거 사실인가요?”하고 묻는다. 이어서 “이현상이 어떻게 죽었는지 혹시 알고 있소?”하고 묻는다. 나림은 “‘학자 빨치산’의 죽음은 미군이나 국군의 탄환을 맞고 죽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상한 점이 있다”는 당시 미국 타임지 기사로 답했다. 노정필은 남로당계 숙청 기록을 읽고 이현상의 죽음에도 의문을 가져본 것이다.

■노정필 내면에 균열이 시작되고

볼셰비키 혁명에 적극 참여했지만 소련 정책을 비판하다 서른살에 요절한 비운의 여성작가 라리사 라이스너.
노정필은 나림에게 라리사 라이스너의 책이 있느냐 묻는다. 라리사 라이스너는 볼셰비키 혁명에 적극 참여한 러시아 작가다. 직접 전투에도 나선 열혈 혁명 투사였으나 소련의 정책을 비판하다 서른에 요절한 비운의 여성이다. 빛나는 미모와 리얼리티 넘치는 르포르타주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밝고 건강하며 아름다운 혁명가는 로맨스도 많았다. 트로츠키가 회고록에서 상찬하는 등 크게 아꼈으나, 트로츠키파라는 이유로 라이스너의 문학은 스탈린 시대에 말살됐다. 노정필은 도쿄 유학 시절 흠모하며 읽었던 라리사 라이스너를 다시 찾으며 잃어버린 청춘을 기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마침 르포 ‘전선’을 소장하고 있던 나림은 ‘소설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싸서 준다.

다시 만났을 때 노정필은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그건 기록자가 쓴 기록이 아니라 시인이 쓴 시”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기록이 되려면 시와 결별해야 하오. 기록자는 자기 속의 시인을 추방해야 할 거요”라고 단언한다. 나림은 기록이 문학이 되려면 시심이 기록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스며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만 권의 기록을 한 줄의 시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시인이 되겠다고도 한다.

노정필은 주장한다. 시는 구체적 슬픔이나 개체적 죽음을 추상적으로 페인트칠해서 마치 다른 의미라도 있는 듯 꾸민다, 허무와 절망을 노래해서 무슨 구원이라도 있는 양 조작한다, 패배를 미화해서 패배자가 되도록 권유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그런 시인의 교활한 작품이다. “당신의 시인은 세상을 기만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기만했단 말이오”라고 말하곤 예의 무심한 돌로 되돌아간다.

나림은 성실성도 모자라고 각오도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 기록자라고 자부하고 나선 걸 야무지게 지적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엄격하게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한 주제에 설익은 글재주로 심각한 문제를 건드리고 조작된 센티멘털리즘으로 인간 품위를 지킨 사람들을 모독하는 것에 분노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람은 나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쭙잖은 작품을 호락호락 내보인 경솔함 덕분에 노정필이 보물처럼 아끼던 미움을 털어놓게 했다는 위안은 있다. 꼭꼭 숨겨두었던 그 미움을 오롯이 받아준 게 혹시라도 노정필의 인간 회복을 촉진했다면 그것도 한 보람이라 생각했다.

■“돌이 되는 것보다…”

‘겨울밤’, 나림이 1974년에 쓴 작품이다. 이듬해 속편으로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란 단편을 썼다. 황제 노정필은 나림의 끈질긴 권유에 응해 뒤늦게라도 “생활에 열을 내보려” 애썼다. 감옥에서 익힌 목공 기술로 취업도 하고 쉬는 날엔 마당에서 장롱도 만들었다. 굳었던 얼굴에 표정도 생기고, 백화점에서 선물을 잔뜩 사 들고 고향 성묘도 다녀왔다. 하지만 황제가 평민 노릇하기 어렵다. 평민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황제 노릇 하기는 더욱 힘들다. 1975년 공포된 사회안전법으로 다시 옥에 갇히게 된 노정필은 “감옥 창살에 해를 가두고 달과 별을 가둬두고 살기 위해” 떠났다.

나폴레옹처럼 죽어야 할 사람도 있고 소크라테스처럼 죽어야 할 사람도 있다. 시를 싫어한 문인으로 죽어야 할 사람도 있고, “돌이 되어 버린 무신론자”로 죽는 사람도 있다. 나림의 답이다. “죽음이란 모두가 억울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의 죽음을 참고 견디는 것은 나도 한번은 죽을 것이란 그 체념으로 인해서다.” 나림은 거기에다 장 콕토의 유언을 더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내가 죽거든 슬퍼하지 말고 눈물을 흘리지도 말라. 슬픈 척만 하고 눈물을 흘리는 척만 하라. 예술가란 본래 죽을 수가 없다. 죽은 척만 하는 것이다.” 과연 보헤미안으로 살다가 간 장 콕토다운 발상이다. 다시 거기에다 나림이 이렇게 덧붙인다. “어찌 예술가뿐이랴. 사람이란 본래 죽을 수가 없다. 죽은 척만 하는 것이다.”

나림은 그 죽은 척만 하는 무수한 군상을 생각하고, 학병으로 죽은 친구와 곤론마루 침몰로 죽은 친구와 6·25 전란 중 희생된 친구를 기억한다. 그 끝에 싸늘한 표정의 석고상처럼 생불여사(生不如死) 삶을 사는 노정필을 떠올린다. 노정필은 나림에게 “기록자가 되기보다 황제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비꼰다. 나림은 “돌이 되는 것보다 황제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고 응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유감(遺憾)이 ‘겨울밤 : 어느 황제의 회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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