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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서 권유받고 호기로 쓴 첫 작품…나림 레토릭의 뿌리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41> 이병주의 첫 소설 ‘내일 없는 그날’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10-26 19:20:18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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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작 경험 한번 없이 덥석 수락
- 1950년대 사회 세태·이슈 가득
- 재미와 감동 넘쳐 영화로도 제작

- 옥살이 주인공·학병·교수 등 등장
- 나림 삶 예견하듯 전개된 스토리
- 초대형 연재 소설가 탄생의 초석

취중(醉中) 호언장담(豪言壯談) 한마디로 소설이 한 편 완성되었다. “글 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도 아니고, 우렁각시 솜씨도 아니며, 도저히 범인(凡人)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림 이병주의 첫 번째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 나림 이병주의 등단과 작품활동에 관한 알림판이 있다. 나림 이병주 작가의 공식 등단은 ‘1965년 소설·알렉산드리아 발표’로 공인돼 있으나, 실제로는 그에 앞서 1957~1958년 부산일보에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했다.
1957년 나림은 마산 해인대 교수였다. “3류 대학의 3류 교수이니 나는 9류다”라고 자조했지만, 제자와 동료의 전언에 의하면 나림의 외국어와 철학 강의는 훌륭했다. 그리고 살롱 ‘외교구락부’를 베이스캠프로 활발한 문화생활을 했다. 넉넉한 인품과 동서양을 관통하는 학문, 그리고 세련된 미감(美感)에다 구수한 언변까지, 나림 주위엔 사람이 많았다.

■친구 황용주의 권유

이병주문학관에 전시된 작가 이병주의 육필 원고(위쪽)와 그가 쓰던 담배 파이프.
나림은 종종 부산에 나와 친구 황용주 등과 주석(酒席)을 가졌다. 황용주와 부산일보 이상우 편집국장이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연재소설 이야기가 나왔다. “연재소설은 주로 서울의 작가에게 청을 하는데 지방 신문이라 그런지 큰 성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부탁할 지방 문인도 마땅치 않으니 이 교수가 한번 써 보는 건 어때?” 하는 강권에 호기가 더해져, 쓰기로 덥석 약속하고 말았다. 객기에 책임감에, 소설 습작 경험이 없는 나림은 고민했으나 “신문소설답게 쓰려고” 애썼다.

그해 신문에 연재된 소설로는 김내성의 유작이 된 경향신문의 ‘실락원의 별’과 김말봉이 국제신문에 연재한 ‘푸른 장미’ 등이 있다. 두 작품에서 보듯 나림이 작정한 “신문소설답게”는 우선 대중성이고 다음 적당한 신파성이다. ‘내일 없는 그날’은 그 문법에 충실한 소설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으며 적당한 최루(催淚)도 있다. 연재를 마친 이듬해 이민과 문정숙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안형수 역을 한 이민은 최무룡 김진규가 등장하기 전 최고 인기를 누리던 원조 꽃미남이다.

‘내일 없는 그날’은 무엇보다 1950년대 중반 세태를 살피는 의미가 있다. 6·25 전란이 끝난 부산 진주 대구를 무대로 하는 소설은 극심한 실업(失業)과 도농(都農) 문제, 인구 30%가 굶어 죽어가는 현실 등 다양한 사회 이슈를 언급한다. 내전이 본격화된 베트남 사정과 내전 후유증을 겪고 있는 한국을 비교하는 대목도 있다. “깜둥이”라는 멸칭(蔑稱)에 화를 내는 대신 “우리들의 슬픔을 캄프라치하기 위해서 이처럼 검다”고 말하는 흑인 장교와의 우정을 통해 차별 문제 또한 다룬다. 너무 심각하지 않게 슬쩍슬쩍 훑듯 지나가지만, 핵심은 견고하게 짚고 있다.

진지한 세태 분석에 더해 당시 상영되었던 영화를 통해 유행과 풍조, 그리고 심리를 비견(比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경숙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가 강간당했던 과거를 고백하려는 순간 로버트 조던이 입을 막고 “당신은 틀림없는 처녀”라고 위로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펑펑 쏟는다. 남편도 이 영화를 봤다면 혹시 용서해 주지 않을까 하는 아련한 희망과 환상을 가진다.

흑심을 품은 상사의 유혹에 대응하는 혜영의 심태(心態)는 ‘사브리나’를 함께 보고 나서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난다. 형수에게 마음을 주었으나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하는 비연은 팜므파탈과 작가의 사랑을 다룬 낭만적 범죄 영화 ‘애수의 호수(Leave Her to Heaven)’를 떠올린다. 혜영이 어르듯 다루는 복수 대상의 안절부절못하는 심리를 ‘심야의 탈주(Odd Man Out)’ 제임스 메이슨의 불안과 연결한다. 참 다채롭다.

■생동감

이병주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해1959년 개봉한 영화 ‘내일 없는 그날’(감독 민경식) 포스터. 출처=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내일 없는 그날’은 이런저런 상처를 안고 사는 인물 묘사가 생동감 있다. 아내의 한 번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전전반측(輾轉反側) 끌탕을 하는 예술가 안형수. 남편 구하자고 허겁지겁하다 함정에 빠진 김경숙. 오빠 집안을 풍비박산 낸 가해자를 유혹하여 기어이 복수하는 안혜영. 안형수의 우수에 찬 모습에 공감하여 접근했다가 기품과 맑음에 반해 인생을 거는 비연. 매사 굿 보이처럼 보이려고 애쓰지만 실상은 비루하고 졸렬한 강윤철. 중심을 잡아주고 정신적 리더 역할을 하는 나림의 분신 성유정 등 캐릭터의 리얼리티가 선명하다.

안형수는 “최저 생활을 하며 최고 정신을 유지하는 게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음악 교사였으나 2년 징역살이한 후 부두 노동자 자리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한다. 부모와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낙향해 농사라도 짓느냐 도시 빈민으로 버텨보느냐의 기로에 있다. 다만 생활도 생활이지만 실상 고민은 집을 나가고 없는 아내를 찾느냐 잊고 마느냐 하는 문제다. 아내의 부재는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왜 미욱하게 함정에 빠졌냐 하는 미움도 강하다. 정면으로 맞지 못하고 좌면우고만 하는 결벽증이 심한 캐릭터다.

김경숙은 스스로 지옥을 택했다. 오직 필요한 건 이해와 사랑이나, 남편은 가정을 위해 감당할 수 있는지를 고뇌할 뿐이다. 공공막막(空空漠漠)한 세월, 내일 없는 그날을 견디지 못하고 청산가리를 먹는다. 강윤철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신사이지만 욕정과 출세에 눈먼 속물이다. 자신이 유린(蹂躪)한 여성의 시누이임을 알면서도 혜영을 향한 욕망을 가속하는 악한이다. “복수의 도끼를 멈추게 할 그 어떤 철학도 이론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혜영에게 염산 테러를 당한다.

성유정은 “무엇에든 깊은 이해가 있고 어떤 것이든 등한시하지 않는” 인물이다. “일종의 지식적 불구자”이고 “건방지기 알맞은 교양”이며 “붙들 게 없으니까 책이나 붙들고 늘어졌다”고 자괴(自愧)하지만, 인생의 기미(幾微)를 알고 인정이 두터운 호인이다. 친구 동생 형수에게 맹렬한 충고를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남겨두는 어른스러움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의미를 해석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죄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죄라는 뜻으로서 죄, 그렇다고 해서 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서 벌.” 도스토옙스키 전문가 나림의 독특한 해석이 여기서 첫선을 보인다.

■나림 소설 원형 품은 첫 발표작

조연 역할 중 개성 강한 캐릭터가 여럿 있지만 경숙의 친구 미야와 기생 비연이 특히 그렇다. 미야는 자유분방한 연애 지상주의자로, 개결(介潔)하고 정숙한 경숙과 대비되는 캐릭터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이렇게 말한다. “난 그 책을 읽고 눈이 번쩍 뜨였어. 며칠 밤 며칠 낮 죽을 고생을 해서 큰 고기를 잡기는 했는데, 상어 떼에게 살덩어리는 죄다 떼어 먹혀버리고 뼈다귀만 남은 얘기야. 목적을 먼 앞날에 두고 현재를 희생하다간 그런 꼴이 된다는 교훈이었지.” 아! 그런 해석도 가능하구나 싶다.

비연은 “꼬리가 긴 독특한 눈을 중심으로 풍기는 청초한 기품”으로 남성을 압도하는 베테랑 기생이다. 세상 남자는 대강 사기꾼 아니면 그 비슷한 자들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형수를 만나고 참으로 맑고 훌륭한 남자도 있다는 걸 알았다. 다만 “기생이 천하다는 건 언제나 상대방 남성에게 자신을 가질 수 없으니 그래요”라는 자기 인식이 강하다. 사랑과 사상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사랑에 재산과 목숨을 다 건다. 나림의 화류계 여성을 보는 시선은 늘 따뜻하다.

‘내일 없는 그날’은 나림 소설의 한 특징인 근사한 레토릭 모음을 보는 재미도 있다. 이를테면, “사람이 본질적으로 슬프고 고독하다는 건 어린아이가 잠자는 얼굴을 보면 안다” “행복했건 말건 인생의 황혼은 슬프다” “아첨에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인생이다” 등이 적절한 에피소드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줄을 그어가며 외우고 싶은 촌철살인 레토릭이 연잇는다.

‘내일 없는 그날’은 첫 소설답게 나림 문학의 원형이 많이 보인다. 억울한 옥살이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학병 지원을 부끄러워하는 딜레탕트 교수가 내레이션을 하며, 사랑과 사상 사이 거리 재기에 애쓰는 남녀 등 이후 작품들의 프리퀄 느낌이다. 호언으로 시작한 초대형 연재 소설가의 탄생이다. 예감이랄까 ‘말이 씨가 된’ 경우랄까 나림은 이 소설을 쓴 몇 년 후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그리고 전업 작가가 된다. 나림의 레토릭으로 하자면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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