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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림의 뉴욕, 추방자·이방인도 새 삶을 얻는 ‘사랑의 도시’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8> 나림의 뉴욕 이야기 ② 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8-31 19:23:29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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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80년대 뉴욕을 사랑한 나림
- 그가 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 소설 ‘허드슨강이…’에 잘 드러나
- 사랑에 질병까지 공유·유대하는
- 이민자 뉴요커의 삶 다룬 스토리

나림 이병주는 뉴욕이라는 공간과 궁합이 잘 맞았다. 나림의 존재론적 지향은 자유와 해방이다. 평생 지향한 탈권위주의적 개방성과 포용성을 뉴욕에서 체감하며 나림은 그 도시를 인간답게 사유하며 체류할 수 있는 거점이라 여겼다. 초절(超絶)의 도시 뉴욕을 나림은 “나의 도시”라며 만끽했다. 나림은 뉴욕을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허용되는 곳. 매일처럼 어디선가 기적이 일어나고, 상식적으로 이해 못 할 난센스가 발생하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뉴욕은 세계 도시의 상징이다. 뭘 해도 된다는 자유로움이 물 흐르듯 바닥에 깔려있고, 잡종성(Hybridity) 즉 다양성 융합 관용성이 만개한 곳이다.
사진 속 다리는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잇는 브루클린 브리지로, 1883년 개통했으며 뉴욕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곽재용 나림연구회 회원·진주교대 명예교수 제공
지금은 “진보에 찌든 지저분한 도시”라는 오명에 시달리지만, 적어도 1970-80년대 나림이 자신과 정체성이 맞다고 느낀 때의 뉴욕은 그랬다. 나림의 망명의 사상에 꼭 맞는 공간이다. 추방당한 자끼리 서로 알아보고 정서적 유대감을 느껴 버번위스키를 수작(酬酌)하며 통음(痛飮)한다. 북유럽 끝과 극동에서 온 중년 남자 둘, 말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소통하여 이튿날 다시 만나는 기적 같은 이야기. ‘제4막’이다.

■집필 배경? 뉴욕이니까!

미국과 뉴욕을 함께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나림 이병주 작가도 같은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2024년 겨울 촬영. 곽재용 나림연구회 회원·진주교대 명예교수 제공
그 단편에 이어 나림은 또 한 편의 기적 스토리를 쓴다.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느 구석에선가 부대끼며 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공간 뉴욕에서 무명소졸 이야기를 강변 정담처럼 들려준다. 정담이지만 꼭 우아하거나 편안하지만은 않다. 엽기적인 대목마저 있다. 하지만 정겹기도 하고 진심도 있다. 무엇보다 뜨듯함이 있고, 위신이 있다. 더 갈 데 없는 바닥에서도 사람다움을 견지하려는 의지가 애틋하다. 알고 보니 그 거지가 천재였고 천사였다. 리버사이드 스토리 ‘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다. ‘제4막’ 7년 후에 쓴 작품이지만 내용은 그 이전 시기인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나림은 뉴욕을 상처받은 사람 특히 사상적으로 상처 깊은 사람들이 모여 위로받고 연대하며 끝내 재생의 기회를 얻는 곳이라고 여겼다. 카스트로의 쿠바에서 추방된 카를로스가 그렇고, 유고슬라비아 태생 폴란드 전쟁고아 알렉스 페트콕이 그러하며, 양심적 언론인이었으나 글을 포기하고 사업 하다 실패하여 사기꾼을 찾으려고 온 신상일이 그런 사람이다. 서울에서 촉망받는 패션디자이너였으나 스캔들 한 번으로 추락하여 허겁지겁 도망치듯 와서 폐인처럼 지내는 낸시 성도 그렇다.

뉴욕은 추방자 이민자 망명자 불법체류자인 그들에게 최후의 거점이다. 자본도 권력도 인맥도 없지만 생존을 허용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남루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모여 서로 어울려 살고 죽는다. 그 인연과 사연을 나림은 리버사이드 스토리로 엮었다. ‘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를 읽고 나는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천재와 폐병 그리고 사랑이다. 첫째, 이 소설은 천재에 대한 송가(頌歌)다. 나림이 정의한 천재란 일상 굴레에 구속되지 않고 삶부터 죽음까지 스스로 선택한 자유인을 말한다. 내부에 에너지가 충만하니 은근한 자신감에 타인의 시선을 애써 의식하지 않는다.

그 에너지를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작업에 집중한다. 천분(天分)에다 치열함까지 더해지니 엄청난 성취가 쌓인다. 다만 생전에 상응하는 리워드를 얻느냐는 게 문제인데, 그건 운의 영역이다. 천재 화가 페트콕은 폐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천재성을 다 쏟아낸다. 그는 요절하고 작품은 당대에 빛을 보지 못했으나, 부인 낸시 성을 거쳐 재혼 남편 신상일 그리고 다시 신상일 부인 헬렌에게로 전해지며 결국 세상에 찬연한 빛을 드러낸다. 상상컨대 귀재(鬼才)의 귀기(鬼氣)가 서린 절품(絶品)일 것이다.

나림 작품엔 천재가 많다. 사람을 천재 수재 범재 둔재로 나누기도 한다. 다만 그 구분에 엘리트주의 거만함이나 특권 의식은 없다. 천재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림이 생각하는 천재의 특성은 감격할 줄 아는 감수성이다. 나림은 누구나 타고난 감격성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저항했다. 뉴욕이란 공간이 그 감격성을 키워주는 분방한 분위기여서 애착했다.

■연대와 선물

둘째, 폐병이다. 폐병, 정확하게 폐결핵은 피를 토하고 죽는 병이다. 가장 비참할 때 찾아오는 병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염된다. 페트콕부터 시작된 폐병은 낸시 성으로 다시 신상일과 헬렌에게로 전염되며 병을 통한 유대가 맺어진다. 피는 생명이다. 피를 토하는 병으로 연결된 ‘폐병 연대’, 아주 상징적이다. 병으로 엮어진 인연, 숙명이다. 나림은 “폐병을 앓는 게 정상이다. 인류는 모두 폐병에 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니 이 세상이 위선인 것이다.”라고 했다. 숨쉬기 곤란한 정도로 오염되고 누추한 세상에서 폐를 상하지 않고 산다는 게 용하다.

각혈하고 죽은 귀재 페트콕의 유작은 뉴욕과 파리의 최고 갤러리에 전시되고 초고가에 매도된다. 남은 이들에게 주는 천재의 선물이다. 신상일은 뉴욕에 온 지 5년 만에 서울에서 진 빚을 3배로 갚는다. 50년 전에 45만 달러면 거액이다. 어떤 채권자는 겨우 3배가 뭐냐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이나림은 3만 달러를 되돌려받고는 전후 사정을 꼭 알고 싶어 뉴욕으로 간다. 신상일이 뉴욕에 온 지 8년 뒤 일이다. 천방지축 거리의 천사에서 신상일의 감화로 단아한 귀부인이 된 헬렌이 남편의 유품 일기와 메모장을 건넨다.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귀빈실보다 더 격조 있게 꾸며놓은 빌라에서 허드슨강을 내려다보며 이나림은 기막힌 리버사이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 속으로 뛰어들라

셋째, 역시 남는 건 사랑뿐이다. 상처가 깊어 아무런 여유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랑을 주고 싶고 또 받고 싶다. 어떤 경우에서도 정을 주고 보듬고 돌보는 건 인지상정이다. 다만 사랑은 색깔이 참 여러 가지이다. “내 옆에서 죽어!” 하며 집착하는 애집(愛執)도 사랑이고, 측은지심에 보살피는 사랑도 사랑이며, 아낌없이 다 주는 모성애적 사랑도 사랑이다.

신상일은 겸손한 미소를 짓는 미남자다. “조심스러운 성격에 양식(良識)으로만 만들어진 듯한 인품”의 남자가 낙백(落魄)한 모습에 헬렌과 낸시 성은 측은지심을 느낀다. 그 감정은 점차 정욕의 사랑으로 변화하다 종국엔 모성애를 닮은 헌신으로 이어진다. 모성애적 사랑은 남성이 여성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이다. 나림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사랑을 그렇게 규정한 바 있다(연재 9회 ‘청사에 얽힌 홍사’).

자신을 기사회생하게 헌신한 사랑을 소중히 할 줄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 태산을 안아 넘기듯 힘든 여름과 겨울을 두 여인 덕분에 넘긴 신상일은 인간으로서 진실을 다할 최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선 낸시 성과 결혼한다. 폐병이 깊어진 낸시를 살리고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혼식은 할렘의 교회에서 흑인 목사의 주례로 쿠바 망명 이민자 하객의 축복을 받으며 진행한다.

이름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뉴욕 한인사회와는 단절한다. 짧은 결혼생활이지만 낸시는 남편에게 엄청난 재산과 위안을 준다. 그 물질과 위안은 폐병 유대로 연결된 신상일에서 다시 헬렌에게로 전해진다. 운명 인간 사랑의 함수관계가 묘하고 애틋하다.

■뉴욕 뉴욕

이 작품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장면도 많고 포복절도(抱腹絶倒) 하게 하는 이야기도 잔뜩 있다. 특히 모나코의 사형수 이야기는 읽고 또 읽어도 웃음을 멈출 수 없다. 허무맹랑하면서도 풍자가 진하다. 죽어가는 아내를 잠시라도 유쾌하게 해주려 우스갯거리를 찾고 만들어내는 남성 순애보가 눈물겹다. 나림이 중시하는 건 조금이라도 착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마음이다.

“이왕 죽으려면 고운 달밤에 죽고 싶다. 내가 죽은 뒤에도 청명한 날씨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소망 같은 것이다. 뉴욕 아니라 세상 그 어디에서도 결국 남는 건 사랑이다.

※특별후원 : BNK금융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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