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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잠 깨운 신문소설…규범과 일탈 줄타는 ‘어른의 사랑’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5> ‘돌아보지 말라’ : 나림 연재소설 시대의 시작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7-20 19:28:21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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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전후 연재소설 전성기
- 역사·연애·기업물 장르 안가리고
- 초인적으로 쓴 나림이 단연 제왕

- 경남매일 연재한 ‘돌아보지 말라’
- 사랑과 사상에 관한 인문적 통찰
- 애틋한 연애소설의 재미도 대단
- 발동동 구르며 그날 신문 찾게해

신문 연재소설의 전성기가 있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읽으려고 새벽 신문 배달을 문밖에 나가 기다린 적이 있다. 나 말고도 이웃 여럿이 서성이고 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던 시절 황석영은 전국 어디에서나 송고(送稿)에 특혜를 받았다. 통신시설이 요즈음 같지 않았던 때 독자들이 앞다투어 원고 배달을 도와준 것이다.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나림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도 ‘낙양지가(洛陽紙價)’를 잔뜩 올렸다. 1970년대의 풍경이다.
개원 60주년을 맞이했던 2006년 찍은 국립마산병원 사진. ‘돌아보지 말라’의 중요한 공간 배경이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신문소설의 전설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 황산덕이 소설 속 교수 부인의 일탈을 비판하는 글을 올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지면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가치관과 창작 자유를 두고 논쟁이 격화되며 정비석과 황산덕이 치고받고 싸웠다는 만우절 농담이 다 있었다. 영화화되어 소설은 더 유명해졌다. 사형폐지론을 주장하던 학자 황산덕은 박정희 대통령 유신 후 법무부 장관이 되어 나림의 실록소설 ‘그해 5월’에 한 대목 등장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전’이 있다. 벽초 스타일의 계몽이었고, 독자에겐 카타르시스였다. 1918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한국 근대 최초 장편소설 춘원 이광수의 ‘무정’도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박종화의 역사소설 ‘금삼의 피’는 1936년 매일신보에, 김내성의 추리소설 ‘마인(魔人)’은 1939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한국 최초 무협 소설 김광주(작가 김훈의 아버지)의 ‘정협지(情俠誌)’는 1961년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다.

■무엇이든 쓸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부산 민주화 운동·시민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고 이종석 선생. 생전 나림과 깊이 사귀었다.
신문 연재소설은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명품의 산실이었다. 특히 퇴고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작가에겐 실력 발휘할 수 있는 기막힌 공간이었다. 독자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며 교양과 재미를 얻었다. 김성종이 일간스포츠 신문에 썼던 ‘여명의 눈동자’와 이문열의 자전소설 ‘변경’, 최인호를 다시 보게 한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 그리고 김주영의 ‘객주’ 등이 연재를 기다리게 했던 소설이다. 하지만 1970~80년대 연재 소설의 제왕은 단연 나림이었다.

신문뿐 아니라 종합 월간지에도 연재소설이 있었다. 월간중앙 신동아 세대 월간조선 등 잡지도 단편과 중편 사이 연재소설을 실었다. 그 잡지와 신문에 나림은 1971년과 1972년에 걸쳐 ‘지리산’과 ‘허상과 장미’ 등 장편소설 6편을 연재했다. 1981년과 1982년 사이엔 한국일보 ‘유성의 부’, 신동아 ‘황백의 문’ 등 5편을 연재했다. 괴력이다. 초인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역사소설이든 연애소설이든 기업소설이든 작가는 무엇이든 쓸 수 있어야 하고 써야 한다”는 나림 프로페셔널리즘의 소산이다. 나림 식 문자로 하면 “주문 제작자로서의 소설가”다. 이 대목이 곧 나림 평가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돌아보지 말라’(사진)는 1968년 경남매일에 연재되었다. 나림을 롤모델로 작가가 된 고승철은 나남출판 주필 시절 이 작품을 발굴·출판하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고 작가가 다니던 마산중학교 교무실에서 있었던 신문 실종 사건이다. 교장부터 서무실 직원까지 전체 교직원이 얼마나 그 소설을 기다리며 열독했는지 묘사가 현장감 넘친다. ‘돌아보지 말라’는 재미와 의미를 함께 주고 개인사와 시대사를 접목하는 나림 필법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남녀가 교사이고 마침 배경도 마산이어서 더 공감했을 마산중학교 교무실 풍경이다.

독서 세대에겐 작가가 멘토였다. 신문에 작품을 연재하는 작가라면 더욱 인기 있었다. ‘나림 사단’의 주장(主將)이자, 5·16 후 나림과 함께 수감생활을 한 이종석은 남성여고 교사 시절 나림의 부산일보 연재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읽고 찾아가 교제를 시작했다. 나림은 박학다식하고 기개 있는 교사 이종석을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 논설위원으로 초빙했으나 이종석은 사양하고 경남 교원노조 위원장 일에 전념했다. ‘돌아보지 말라’의 사회 교사 윤태호는 교원노조 간부로 체포돼 10년 형을 받고 7년 만에 출소한다. 그 시간을 기다린 방근숙과의 러브스토리가 애틋하다.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초상화. ‘돌아보지 말라’에서는 이병주가 소화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만난다.
‘돌아보지 말라’는 나림 인문 클래식의 한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을 통찰한 장자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소개하고, 불교를 현상학으로 해설하며, 러시아 작가의 단편을 통해 부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은유한다. 운명과 섭리를 말할 때 나림이 꼭 인용하는 ‘노자’의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기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 )”도 나오고, ‘논어’의 “서자여사(逝者如斯 이렇게 흘러가는구나)”도 인용한다. 그 여사(如斯)에서 따서 나림은 ‘여사록(如斯錄)’이란 제목의 단편을 썼다. 장자 에피소드는 약 20년 뒤 ‘소설 장자’ 연재로 이어진다.

나림이 마키아벨리의 단편 ‘벨페고르’를 인용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정치사상사에서 칭송과 폄하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논쟁적인 사상가이지만, 소크라테스 볼테르 칸트와 병렬할 정도의 인물이다. 역대 사상가들을 고뇌케 했던 정치와 윤리 사이의 인연 즉 권력과 도덕 관계를 명쾌하게 끊어준 공로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상식과 통찰력으로 실사구시적 제언을 한다. 인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 마키아벨리는 “사람은 부친 살해는 용서해도 자기 재산 몰수는 참지 못한다”고 했다.

마키아벨리는 인성을 냉혹하게 통찰한 대가다. 신중한 지도자는 살인은 해도 약탈은 안 된다는 충고는 그런 냉소적 인간관에 기인한다. 마키아벨리는 다재다능하고 격정적인 기질의 사나이였다. 충실하고 유능한 관리였으나 마흔넷에 해직되고 옥살이까지 했다. 공직자로서 재기불능의 바닥에 떨어진 후 제2의 인생은 글로 승부하며 산다.

비운의 은둔생활에서 문인으로 천재성을 발휘하여 희곡 ‘만드라골라’와 단편 ‘벨페고르’를 쓴다. 결혼 생활의 문제점을 현지 체험하고자 악마 벨페고르가 현신(現身)한다. 벨페고르는 미모의 여성과 결혼하여 잠시 행복을 느끼나 했으나 부인의 사치와 처가 식구의 낭비 허세 행태에 빈털터리가 된다. 환멸을 절감하고 결혼의 굴레를 벗어나려 초능력까지 쓰며 허둥지둥하지만 쉽지 않다. 악마가 인간계에 내려와 당하는 고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마키아벨리의 필치는 경쾌하고 풍자는 ‘징하다’.

■성실과 갈망과 시간

‘돌아보지 말라’는 나림의 인생 열차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사랑과 사상의 거리 재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이 없는 사상은 각박하고, 사상이 없는 사랑은 천박하다.” 주인공 남녀는 우연이 거듭되면서 서로 끌린다. 난치병 배우자를 오래 간병해 왔다는 동병상련에다 직업적 동질감 그리고 만날수록 매력까지 느끼며 건강한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끌림이 더할수록 고뇌도 심해진다. 끝까지 사람의 도리를 지키려는 위신과 새로운 사랑의 갈망 사이에서 번민이다.

규범과 일탈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돌아보지 말라’의 묘미다. 나림의 작품엔 따듯함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벨페고르’를 인용해 각박해지려는 주인공 심정의 일단을 드러내지만, 역시 본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 정욕과 사랑 사이의 균형도 건강하다. 플라토닉 러브로만 그쳤다면 고답적이다. 배우자들이 세상을 떠난 후 기다렸다는 듯 선뜻 결합했다면 얄밉다. 나림은 시간과 격리라는 시금석으로 사랑을 단련한다. 7년 만에 사랑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면 과연 ‘돌아보지 말라’고 할 만하다.

윤태호는 감옥에 격리해 있는 동안 자신을 성찰한다. “나는 불성실한 남편이었고, 불성실한 친구였으며. 불성실한 아들이었다”고 참회한다. 성실한 사람만이 스스로 불성실을 돌아보고 자괴(自愧)한다. 방근숙은 7년 전 그 주소에 그대로 거주하며 윤태호의 출감을 기다린다. 이전 배우자에 대한 죄책감이나 혹시 배신의 기초 위에 서둘러 행복의 성을 쌓으려 한 건 아닌가 하는 민망함에서 벗어날 만큼의 충분한 시간과 시련이다. ‘돌아보지 말라’는 어른스러운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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