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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난세 영웅’들의 운명 지켜본 나림의 통찰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3> ‘산하’ ② 나림의 해방정국 지도자 품인(品人)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6-22 19:37:38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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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정국 인물 중 여운형을
- 가장 흠모하고 지지한 나림
- 그가 백주에 테러로 살해되자
- 중도 실험 꺾였다 탄식했지만

- 정세 분석력·엄청난 야심 지닌
- 자기지향적 지도자 이승만의
- 생존과 집권 생리 또한 이해

- 소설 속 다양한 인물 행보로
- ‘시대의 승자’ 등장하는 과정과
- 난세 속 스러지는 리더십 고찰

영웅이 시대를 만들까. 아니면 시대가 영웅을 만들까.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이 나림 이병주의 대하소설 ‘산하’에 나온다.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 세 요소가 감쪽같이 상호작용 해야 비로소 대사가 이루어진다. 해방정국에서 이 세 조건을 인식하고 활용하며 결국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낸 유일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승만이다.
왼쪽부터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긷힌 시절 찍은 여운형 선생 사진, 광복 직후 한국 정치에 막중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 국제신문 DB
영웅의 시대는 공포의 시대이기도 하다. 천하가 태평하면 영웅의 공간은 없다. 영웅은 난세에 등장하여 활약한다. 영웅은 칼의 그림자 아래서 낙원을 찾는 사람이다. 만당(晩唐) 시인 조송(曹松)은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고 읊었다. 큰 장수 한 사람이 공을 세우는 데 만 명 병사가 희생된다는 뜻이다. 영웅은 그 해골 위에 우뚝 선다. 도덕적 선악을 떠나 영웅은 기회를 포착·활용하는 능(能)과 시세를 타는 운(運)이 있어야 한다. 영웅은 자신의 결점마저 장점으로 전환하여 스스로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주역이다.

해방정국 3년은 난세 중 난세였다. 외국군이 주둔하여 군정을 펴고, 미국과 소련은 덕수궁에서 만나 신탁통치를 논하는 대목에서, 민족은 이념과 노선을 두고 합작과 분열을 거듭했다. 냉전이 강화되는 한 변경(邊境)에서 낯선 이념에 천착한 투사들이 무엇을 위하는지도 잘 모른 채 목숨 걸고 투쟁하던 시대였다. 정치적 열풍은 악의만으론 모자라 드디어 살의마저 품어, 장덕수 송진우 여운형 김구 등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민족의 가능을 담보하는 지도자를 저격하는 테러가 난무하기도 했다. 해방은 되었으나 독립하는 과정은 참으로 험난했다.

■해방정국의 여론조사

나림은 해방정국 인물 중 심정적으로는 여운형을 흠모하고 지지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단정(單政)을 반대하고 좌우합작을 도모하려 애쓰는 노선에 동조했다. 둘째, 넉넉한 인품과 양보할 줄 아는 아량이 각박한 시대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 여겼다. 그런 여운형이 백주에 테러를 당하자 나림은 “한민족의 위대한 가능 한줄기가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나림의 충격과 좌절은 여운형이란 존재가 없어짐으로 인해 정치에서 센티멘털리즘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데 있다. “이데올로기와 조직에선 공산당처럼 철저하지 못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과감성에선 우익 정당을 따라갈 수 없으며, 게다가 배후에 미국도 소련도 없는 정당을 카리스마 하나로 끌고 가던 전원(電源)이 사라졌다”는 게 나림의 안타까움이다.

여운형의 의미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좌익과 이승만 노선을 반대하는 우익을 연결하는 직선을 직경으로 원을 그리고 그 원 안에 양심적인 지식분자를 모으는 것인데 그 온건 중립의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중도의 정치 실험 가능성이 맥없이 꺾여버린 것이다.

해방정국에도 여론조사가 있었다. 정확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신할 수 없으나 당시 시중 여론과 지식인 사회 공론을 어림짐작할 수는 있다. 선구회가 서울의 105개 정치 사회 문화단체와 학교에 설문지를 배포하여 물었다.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의 결과는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이다. “최고의 혁명가를 지명하시오”에는 여운형 20%, 이승만 18%, 박헌영 17%, 김구 16%라고 답했다.

그런데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세 번째 설문의 결과가 흥미롭다. 이승만 44%, 김구 30%, 여운형 8%다. 지도자로는 여운형을 선호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선여론협회는 서울의 행인 왕래가 가장 많은 거리 3곳에서 “누가 최초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하고 물었다. 6716명이 응답한 결과는 소수점 빼고 이승만 29%, 김구 김규식 여운형 각각 10%였다.

예나 지금이나 여론은 무섭다. 정작 지도자 자신은 못 보는 걸 여론은 먼저 파악하고 판단한다. 여론은 자신(自信) 있고 기백(氣魄) 강한 리더를 추수(追隨)한다. 정치는 언제나 승자의 정치다. 나림은 “민중은 망설이며 주저주저하는 사람을 지지하진 않는다”고 단언한다. 여론이 지성을 이기는 이유다.

■정치는 야속하고 비정한데

정치학자 이정식은 논문 ‘해방기 한국 정치 지도자 4인에 관한 연구’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을 이렇게 비교했다. 이승만은 카리스마 유형이다. 자의식과 우월감이 강하다. 독선적이고 이분법적 사고를 하며, 선악과 적아(敵我) 구분이 선명하다. 대중 동원과 선동에 능하고 호소력 있다. 여운형은 코디네이터 유형이다. 코디네이터 즉, 조정자는 우격다짐이나 극단을 회피하는 절충주의적 성향이다. 요란스러운 권력 행사보다 절제된 정치력을 발휘하여 세력 간 균형을 도모한다. 이승만이 카리스마를 앞세운 자기지향적 리더십이라면, 여운형은 조정 능력에 의존한 상호작용 지향적 리더십이다. 자기지향적이란 집단과 개인의 목적이 갈등하는 경우 개인을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상호작용 지향적이란 집단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절충을 중시하지만 끝내 조정되지 않으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물러선다는 뜻이다.

김구도 카리스마 유형이다. 다만 이승만과 달리 임무지향적이다. 단독정부 수립은 내전을 초래할 수 있다는 신념에 헛일임을 알면서도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만났다. 남한만의 선거에 국민 91%가 투표했음에도 외면하고 참여를 거부했다. 나림은 “방법 없는 애국”이란 표현으로 김구의 선택을 안타까워한다. 남북협상이 실패했으면 38선에 누워 목숨을 걸었어야 한다. 선거가 있으면 본인도 출마하고 동지들이 대거 당선되도록 유세했어야 한다. ‘산하’의 이종문 같은 민중은 난생처음 직접 대의사(代議士)를 뽑는다는 기대에 남로당의 집요한 반대에도 긴 줄을 서서 투표했다.

이동식 같은 비판적 지식인은 단정에 반대하지만 그래도 “남한에 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표시만으로라도” 투표장에 나갔다.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여 절연한 양근환의 수하이면서도 문창곡과 성철주는 이동식과 같은 이유로 투표했다. 그게 당시 민심이었다. 고립을 자초한 김구의 비극은 방법을 갖지 못한 정치가의 비극이다. “명분만 있지 실질적 전망이 없다. 방법론이 없다.” 포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비로소 정치사상이 될 수 있다. 정치와 양심과의 배치(背馳), 김구의 한계였다. 무력을 갖지 않은 예언자의 말은 통하지 않을뿐더러 되려 비운을 만드는 화근이 될 뿐이다.

김규식은 고결한 이상주의자형이다. 문학가형(literati type)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림은 남북협상에 참여한 송남수의 입을 빌려 “김구 선생은 지사일뿐이고 김규식 박사는 학자 기껏 말해서 정치학자야. 좋든 나쁘든 정치가는 이승만인 것 같애”라고 한다. 6·25 날 우이동 산장에서 5·10 선거에 낙선한 동지들과 야유회를 하던 김규식은 “Lavish green, miserable country”란 시를 짓는다. 풍성한 녹음에 반해 빈약한 조국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뿐, 방법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불모의 미덕이고 상상력의 빈곤이다. 미군정의 은근한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하지 중장을 비판하고 군정 정책을 비난한 이승만의 전략을 당해내지 못했다.

■‘잡놈’ 종문이는 감을 잡았네

해방 이후 전개된 상황을 정리하면 시시비비를 떠나 정세 판단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두뇌가 명석하고 성과 열을 겸전한 송남수의 판단은 전부 빗나가고, 식(食)과 색(色)에 몰두하는 단순 무식 이종문의 판단은 척척 들어맞는다. 여운형과 김규식을 수행했던 송남수는 아무런 보람없이 아웃사이더로 시대 흐름에 비켜서 있다. 욕심도 없고 독기도 없는 옥인(玉人)이란 평가가 과연 칭찬일까 싶다. 이승만에게 모든 걸 걸었던 이종문은 승승장구 정계와 재계의 중심이 된다. 나림의 고민이다. 재치와 도덕의 괴리이고 권력 정치와 양심의 배치라고 하고 말기엔 또 상황이 너무 복잡다단하다.

해방정국은 초대 주한 미 대사 존 무초의 회고대로 “국제정세에 대한 높은 이해력과 미래 정세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가졌으며, 언제든 게릴라 본능이 표출되는 강력한 의지력의 소유자 이승만”의 구상대로 진행되었다.

시대를 주도한 영웅 이승만과 일자무식 잡놈 이종문을 병렬한 나림의 소설 ‘산하’는 사회과학 텍스트로 천하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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