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의 감동
- 美 대통령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
- 대영제국 전 수상 처칠 소회 등장
- 소설 속 상상이지만 스케일 달라
- 해방정국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
- 무식하지만 인연 중시하는 인물
- 이종문 통해 드라마틱하게 그려
- 의리 사라진 현실 정치 오버랩
흥미를 일으키는 서론은 어떤 작가든 노심초사하는 대목이다. 서장(序章) 즉 프롤로그의 첫 구절은 작가의 의지와 능력이 집중되고 의도가 압축된 대목이다. 특히 두괄식(頭括式)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라면 더욱 공을 들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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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주 대하소설 ‘산하’는 광복 뒤 주인공 이종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맺는 인연이 중요한 줄기를 이룬다.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12월 국회에서 자신이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으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고 밝히는 장면이다. 국제신문 DB |
“행복한 가정은 대체로 어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모습이 제각각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구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로 시작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며 운을 뗀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첫 문장은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 행복을 지킬 수 있었고, 모든 게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을까?”이다. 이상은 ‘날개’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도발하며 시작한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고 서두를 열었다. 명사 형용사 부사 조사를 두고 작가가 숱한 밤 했을 고뇌를 절감한다.
■그날의 세계 |
| 1952년 8월 15일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취임식. 국제신문 DB |
나는 나림 이병주의 대하소설 ‘산하’만큼 스케일이 크고 의도가 선명한 서장을 보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과 광복을 맞은 날이다. 한반도의 산하는 ‘그날’ 두둥실 춤을 추고 기쁨에 겨워 소리 높이 노래했다.
‘그날’ 트루먼은 백악관 동쪽의 호화 침실에서 “어쩌면 내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행복한 대통령일지도 모른다”며 기뻐했다. 스탈린은 그루지야의 장미 뿌리로 만든 파이프를 문 채 크렘린 창 너머로 백야를 바라보며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할 지역에 치시마 열도 전부를 포함하고, 홋가이도도 관할하에 두어야지”라고 작정한다.
처칠은 일본의 항복을 대영제국 수상으로 맞이하지 못한 게 아무래도 서운했다. 이미 점심 먹으며 조니 워커를 반병 이상이나 마셨는데도 심기가 밝아지지 않았다. 전쟁 기간 영국을 영도한 자기를 국민이 투표로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두고 봐라. 나는 다시 한번 수상직을 맡고 말 테니까. 스탈린의 음흉한 속셈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내가 그냥 정계에서 은퇴할 수는 없다”고 다짐한다. 드골은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 구상에 열중하고 있다. 앙드레 말로는 드골의 고민을 “키가 크면 슬픔도 또한 크다”는 레토릭으로 묘사했다.
아직 동굴 신세인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을 예상한 듯 “지금부터!”라는 메시지를 준비한다. 네루 호찌민 수카르노 등도 각기 나라 독립을 위해 지모를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가장 순수한 심정으로 겨레와 조국을 사랑한 것도 바로 이 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무한한 우연과 단호한 필연을 체험한 천하의 고수들은 나름대로 모양과 빛깔로 ‘그날’을 새겼다.
■이종문의 ‘그날’‘산하’에서 나림은 ‘그날’ 글로벌 리더들의 반응을 그렇게 상상했다. 촌철살인이다. 과연 나림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이고 스케일이다. 거기에 더해 이런 대목이 이어진다. “그러나 삼각산이 춤을 추든 낙동강이 노랫가락을 부르든 우리의 이종문이 알 바가 아니었다.”
소설 ‘산하’가 어떻게 전개될지 프롤로그의 축도(縮圖)가 클리어(clear)하고 브리프(brief)하다. 천하의 무식쟁이 도박꾼 이종문이 요동치는 해방정국에서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를 업고 과연 어떤 요술을 부릴지 초장(初場)부터 흥미가 동한다. 개인사를 시대사와 연결하고, 사적 사연을 세계사적 의미와 접속하는 게 나림 소설의 한 특장(特長)이다. 고향 김해에서 내내 도박꾼으로 소일했던 ‘천하의 잡놈’ 이종문은 해방된 날 꽹과리를 들고 앞장서서 쾌지나칭칭나네를 밤새 불렀다. 해방이 뭔지 모르지만 좋은 일인 듯하여 신도 났고 흥도 양껏 부렸다. 목이 메고 눈물이 났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다가 벼락 맞은 듯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생전 가본 적 없는 서울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기로 작정한다.
이종문은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를 귀동냥도 하고 체면 불고 묻기도 하며 마음에 새긴다. 민주주의니 인민 세상이니 자유니 하는 낯선 용어를 듣고,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 낯선 인물에 대해서도 듣는다. 옆자리에 앉은 귀환 동포 여성에게 마음을 뺏겨 “저 여자를 내 마누라로 삼아야 내 인생이 피겠다”는 느닷없는 각오를 하기도 한다. 그 흑심이 호기로 이어져 허세를 부리다 역전 음식점에서 양근환 무리에게 실컷 두들겨 맞는다. 시작부터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현란하고 박력 있다. “아! 소설은 이렇게 꾸미는 것이구나” 싶다. 나림 전성기 펄펄 나는 필력이 독자를 흥분시킨다.
■한 고조 유방의 이미지영웅이 시대를 만들까? 시대가 영웅을 만들까? 이종문은 단연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고 확신한다. 그 적나라한 예가 바로 본인이다. ‘산하’를 읽으면 이종문의 뻔뻔함과 비루함에 부끄럽다가도 대담함과 충직함 그리고 어른스러움에 당황스럽다. 나는 이종문이란 캐릭터를 접하며 한 고조 유방이 겹쳤다. 이종문이 유방만큼 큰 인물이란 뜻이라기보다 유방의 건달기와 번번함 그리고 당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스케일과 속셈이 기막히게 닮았다는 뜻이다.
시골의 건달 유방은 땡전 한 푼 없으면서도 고을 명사의 잔치에 거금을 쾌척하겠다고 허세를 부려 상석에 앉는다. 그 허풍에 가려진 잠재력을 본 명사는 유방을 사위로 삼는다. 유방의 천하 장악 과정에 처가와 부인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배짱과 흑심으로 유방은 후흑(厚黑)의 최고 경지에 올랐다.
이종문은 노름판에서 딴 돈을 ‘국부’로 모시기로 마음먹은 이승만에게 쌀값으로 보낸다. 이런저런 귀동냥 끝에 이승만을 무조건 지지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매달 거금을 보내겠다고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려 또 노름판에 끼었다가 급한 마음에 사술(詐術)을 쓰게 되고 엄청나게 얻어터지기도 한다. 그렇게 살신성인 쌀값을 마련하여 매달 돈암장으로 보낸다.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미국에 직접 가서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는 이승만에게 이종문은 달러를 송금하기도 한다. 귀국한 이승만은 장택상 등 줄 서 기다리는 인사들을 뒤로하고 이종문을 먼저 만난다. 이종문의 성공과 몰락은 이승만의 흥망과 함께한다. ‘아부지’ 이승만을 뒷배로 거부가 되고, 의원이 되며, 재조(在朝)와 재야(在野)의 거물로 군림한다. 하지만 딱 권불십년(權不十年)이었다.
■대목 대목 과연 소설이다다만 무식하고 막무가내이지만 이종문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이종문이 국회의 가부 표결에서 비서가 알려준 부(不)가 아닌 부(否)자에 당황하여 진땀을 흘리다 가(可)와 부(否) 사이에 점을 찍고 나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나, 행사장에서 만세삼창해 달라는 주최 측 요청으로 단상에 올라가 “만세삼창!”하고 외쳤다는 실화는 물론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다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일부러라도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하는 유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종문과 그 세대는 적어도 뭔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거나 생산성 제로의 논독(論篤)으로 소일하는 베짱이가 아니었다.
해방 이튿날 서울역에서 얻어터지며 시작한 이종문의 무용담은 15년 뒤 이승만 정부의 몰락으로 끝난다. 그 과정이 대목 대목 과연 소설이다. 이종문 자신이 기인(奇人)이지만 그의 폭풍 성장과 몰락 과정에 참 많은 기인과 인재가 등장한다. 식객으로 이종문을 받아 준 양근환과 미스터리 무도인(武道人) 로푸심 등등 하나같이 드라마틱하다.
이종문은 흠이 많은 인물이다. 미욱한 듯 간계가 있고, 담대한 듯 야비하며, 무식한 듯 실속을 다 차린다. 하지만 이종문에게 결정적인 장점이 하나 있다.
인연을 중시하고 인재를 귀히 여긴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지 않는 어른스러움이 있다. 연적인 듯 아닌 듯 참 버거운 상대에게 선뜻 거금의 선거자금을 대주는 아량과 은원(恩怨)이 쌓일 대로 쌓인 여인을 끝까지 책임지는 의리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사라져 버린 지금 음미하고 싶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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