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로 만든 고려인들 사연
- 메주 등의 발효 과정과 연결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린 걸그룹이야. 베네라, 아이자나, 베로니카, 그리고 난 김 예카테리나.”

부산 수영구 망미동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린 정연두 작가의 전시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에 소개된 영상 작품 ‘피치 못할 블루스’. 국제갤러리 제공

화면 속에서 노래하는 보컬 하현진의 음악은 느리지만 ‘느낌’ 충만하다. 역시 화면 속에서 각각 연주 중인 콘트라베이스(레이 설) 색소폰(코이 시먼즈) 오르간(이효주) 드럼(박서연)까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연주하느라 완벽한 앙상블을 자아내지 않지만, 전시장을 젖어 들게 하는 이들의 블루스 연주는 어색하기보다 묘한 어울림을 들려준다. 연주자들이 박자를 맞추는 것은 발효 중인 반죽의 숨소리와 요리사가 밀가루를 흩뿌리는 모습, 막걸리가 보글보글 기포를 내며 익어가는 순간이다. 각자의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에서 내는 소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불협화음도 아닌, 그들 나름대로 섞여 조화를 이룬다. 어쩌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도 나름의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메주의 발효 과정을 포착한 ‘바실러스 초상’.

국제갤러리 부산점(수영구 망미동 F1963)에서 열린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각각의 작품을 은근히 느끼다 보면 삶을 향한 유머러스한 태도와 관조가 흥미로운 전시다. 국제갤러리가 정연두 작가와 2008년 이후 17년 만의 만남이자, 부산점에서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규 전시다.

국내 대표 미디어 아티스트로 꼽히는 정연두 작가는 사진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통해 일상의 소재를 다루면서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탐구해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07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미국 웨스트 팜 비치, 노턴 미술관, 아트선재센터 ,중국 상하이 K11 아트 스페이스 등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작품을 펼쳤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 2025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등에 참여했고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신작 30여 점을 소개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불균형적이고 이질적이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을 통해 삶의 태도에 관해 이야기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만난 고려인 후손들의 인터뷰를 가사로 쓴 블루스 음악을 미국 서울 등 각자 다른 장소에서 5명의 연주자가 67bpm(분당 박자 수)의 느린 속도와 간단한 코드만 가지고 각자의 상황에 맞춰 연주한다. 이를 통해 완벽한 앙상블은 아니지만 묘하게 협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상 작품 ‘피치 못할 블루스’를 내놨다.

정연두 작가가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블루스 음악과 함께 전시를 이끄는 키워드는 ‘발효’이다. 연주자들이 박자를 맞춘 순간은 모두 막걸리 반죽 항아리 등 발효와 연결하면서 블루스 음악과 독특한 방식으로 엮어 냈다. 전시장 벽에는 메주의 발효 과정에서 나오는 바실러스균이 피어오르는 하얀 거품을 포착한 사진 연작 ‘바실러스 초상’을 걸었고, 블루스 음악의 가사를 천으로 옮긴 작품도 걸려 있다.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사연이 노래가 되고, 그 노래는 발효 과정과 하나가 되며 새로운 호흡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들려준 블루스 음악 고유의 기운을 담아 ‘그래, 삶은 또 살아진다’는 메시지를 은유한다. 그리고 또 하나, 밀가루를 뿌려 우주를 연상하게 하는 화면은 일상의 세계와 또 다른 거대하고 신비로운 세계와 연결되며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준다.

정연두 작가는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진다는 느낌은 슬프지만, 어떨 때는 썩지 않고 발효로 살아나는 것이 기뻤다”면서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각자의 상황에서 연주자 스스로 몰입하는 과정이 각자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길 바라며, 자조적일 때도 있지만 유머러스한 관점과 태도가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지점과 닿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2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