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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학병 자원한 죄의식, 나림 소설마다 트라우마로 등장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0> ‘별이 차가운 밤이면’ ① 색다른 학병 이야기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5-11 19:39:12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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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를 팔아버린 노예…
- 사람으로 행세할 생각 마라”
-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이병주

- 첫 연재작 ‘내일 없는 그날’부터
- 미완성 유작 ‘별이 차가운…’까지
- 부끄러움 안고 사는 학병 등장

- ‘관부연락선’의 학병은 수치심
- ‘지리산’선 의분이 지배했다면
- 유작에선 소설적 재미 더해져

누구나 상흔을 안고 산다. 나림 이병주에게는 20대 초반 일본군 졸병을 자원했다는 사실이 평생 상흔이었다. 나림은 1979년 쓴 에세이에서 “나는 해방 전 24년을 살았고, 해방 후 33년을 살았다. 해방 전 24년의 마지막이 일본의 용병이었다. 10년 남짓 모교와 대학에서 영어 프랑스어 철학을 가르쳤으나 용병 콤플렉스로 한 번도 교사다운 위신을 떨쳐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나림에게 평생 트라우마(정신적 육체적 상처)이자 콤플렉스가 학병 체험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불평즉명(不平則鳴)”이다. 당대(唐代)의 대문장가 한유는 “평안하지 않으면 누구나 아프다는 소리를 낸다”고 했다. 글을 쓰는 것은 불평(不平)을 해소하고 평정을 얻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다. 나림의 ‘다작(多作) 다이나믹스’ 하나가 학병 체험인 건 분명하다. 나림은 첫 연재소설 ‘내일 없는 그날’부터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같은 장편소설과 ‘변명’ ‘8월의 사상’ ‘세우지 않은 비명’ 등 중·단편 그리고 미완성 유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까지 학병 이야기를 계속한다. 주인공 모두 학병 체험의 부끄러움을 평생 안고 산다.

자전 에세이 같은 단편 ‘8월의 사상’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용병을 자원한 사나이. 제값을 모르고 스스로를 팔아버린 노예. 먼 훗날 살아서 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행세할 생각을 말라. 돼지를 배워서 살을 찌우고 개를 배워서 개처럼 짖어라. 죽을 때 너는 유언이 없어야 한다. 노예 같지도 않은 노예는 멸하여 없어질 뿐이다.” 나림은 끝내 자신의 비굴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나림의 학병 체험은 정신적 상처로 그치지 않았다. 나림은 군에서 부상으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한 마디를 절단했다. 중국 쑤저우 주둔 60사단은 치중대 즉 군수부대였고, 나림은 군마 사육 담당이었다. 말 관리를 하다 손가락을 다쳐 파상풍 감염으로 장애가 생겼다. 나림은 자신의 두형문(頭形紋·나선형으로 이뤄진 지문) 둥근 지문이 운을 좋게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는 순간부터 내 운명은 뒤틀리기 시작했고, 행운과 복의 일부가 날아갔다”고 여겼다.

나림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깊이 남긴 학병 시절에 대해 평생 죄의식을 느꼈고, 노예 같지도 않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겠다는 불노(不怒)의 사상을 다짐한다. 나림은 우발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규칙 없이 우연적인 운명을 너그럽게 대하기로 한다. 운명과 섭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삶의 부득이함을 관대하게 수긍했다. 자기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고, 웬만해선 수용하는 그래서 성내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

■“나는 탈출할 생각도 못 했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 뜰에 있는 나림 이병주 작가 조형물 앞에 그의 장편소설 ‘별이 차가운 밤이면’을 놓고 찍은 사진이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나림의 미완성 유작이어서 독자들이 특히 애틋하게 여긴다.  이병주문학관 제공
학병을 자원했어도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사람도 있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충칭까지 가서 광복군에 가담했고, 신상초는 팔로군 지역에서 조선의용군에 입대했다. 이들이 쓴 ‘장정’ ‘돌베개’ ‘탈출’은 이른바 3대 학병 탈출기다. 세 사람은 평북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학병 탈출 1호는 김준엽이다. 쉬저우에서 탈출해 국민군 유격대를 거쳐 광복군에 편입했다가 OSS(미국전략첩보국)의 한반도 극비침투작전 훈련을 받았다. 학병 입소자 4385명 중 197명이 탈출했다. 김준엽과 신상초는 중국행 군용열차 안에서 탈영 계획을 세워 목숨 걸고 실행했다. 나림은 탈출은 생각도 못 했다며 심히 부끄러워했다. 같은 기차를 탔지만 나림은 민요를 부르다 눈물을 흘렸을 뿐이라며 자괴(自愧)한다.

주로 중국 주둔지에서 탈출했으나 버마 전선에서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경우도 있다. ‘모멸의 시대’를 쓴 박순동이다. 버마에서 인도로 다시 미국으로 이동한 박순동은 OSS의 훈련을 받은 19명 한인 요원과 함께 한반도 만주 일본 등지에 침투할 준비를 한다. 그 요원 중엔 쉰 살의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과 이승만 비서 장석윤도 있었다. 작전 투입 전 일본이 항복하자 박순동은 일본군 포로 신분으로 하와이 수용소에 갇혔다가 귀국한다. 어디서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모멸의 시대’였다. 박순동 스토리는 워낙 드라마틱하여 두 대하소설의 모델이 된다.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 장하림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범우다. 박순동은 조정래의 외삼촌이다. 징병을 아예 거부하고 심산에 은거하거나, 만주로 도피 또는 탄광에서 신분을 숨기고 버틴 경우도 있다. 학병 징집을 거부하다 강제 징용된 학생도 있다. 양호민 한우근 계훈제 등이 그들이다. 시인 김수영은 만주로 도피했다.

학병 소설의 효시는 1955년 선우휘가 쓴 ‘불꽃’이다. 다만 선우휘는 학병 세대이긴 하나 사범대여서 징병 대상이 아니었고, ‘불꽃’도 간접 체험이다. 학병 세대가 아니었던 김동리의 ‘자유의 역사’와 ‘등신불’에도 학병 이야기가 나온다. 나고야 수송연대 운전병으로 근무한 한운사는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썼다. 하지만 그 어떤 학병 관련 작품도 나림처럼 시종 자괴감과 죄의식으로 일관하는 경우는 없다.

■박달세의 탄생

일제강점기 학병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독립지사로서도 위상이 우뚝한 김준엽(가운데) 장준하(오른쪽) 선생. 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할 때 촬영한 사진이다. 나남출판 제공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아주 색다른 학병 이야기다. 이 작품의 시작은 “네가 너를 알리라. 너가 네 원수라는 것을!”이다. 복수를 위해 기꺼이 사갈(蛇蝎·뱀과 전갈)이 되기로 작정한 한 남자의 오기와 집념이 강렬하다. 그 남자는 도쿄제국대 법학과를 다닐 정도로 명석하고 도쿄 번화가에 당구장을 차려 매월 교장 월급의 6배 수입을 올릴 정도로 이재에 밝으며 “중국 전통 복장 창파오(長袍)와 양복이 다 잘 어울리는 타이론 파워를 닮은 미남자”로, “현실적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노리는” 인물이다.

현실적 인간으로 승리만 노린다는 건 도덕 체면 경우 다 안 따지고 목표만 지향하며 산다는 뜻이다. 머리 좋고 인물 좋고 계산적이며 인연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재능을 가진 데 더해 사갈의 독기마저 품고 있는 사나이. 나림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독특한 캐릭터다. 거기에 더해 이 남자는 심각한 신분 콤플렉스가 있다.

‘관부연락선’ ‘지리산’ ‘별이 차가운 밤이면’을 학병 3부작이라고 부른다. ‘관부연락선’은 엘리트 학병 유태림 이야기이고, ‘지리산’은 학병 거부자 ‘신판 임꺽정’ 하준규과 역시 학병 거부자인 마지막 빨치산 박태영 이야기다. 유태림과 하준규는 대지주 집안의 자제이고 박태영은 자작농 정도로 생활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신분의 차이 같은 개념은 없다. 그런데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박달세는 머슴 아들 즉 종의 자식이다. 종의 자식이지만 친부는 모친의 주인 최진사다.

최씨 집안의 이름을 굳이 거부하고 의부의 성을 고집하는 박달세는 불과 다섯 살의 별이 차가운 어느 밤을 기억하는 애어른이다. 소싯적 주인댁의 모진 학대와 수모를 견디며 보통학교에서 압도적 성적으로 상전인 이복형제를 누른다. 일본에서 고학으로 야간 중학을 거쳐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이 시기 일본 고위 경찰의 도움으로 머슴 취급하던 이복형에게서 큰 재산을 갈취하기도 한다. 생부 최진사의 유언을 집행하지 않는 데 대한 보복이라고 하나 그 과정이 교묘하다. 박달세는 신세 졌던 일본 고위 경찰의 권유로 학병 대신 상하이에서 일본 정보장교 엔도오 대위의 체신(替身·대역 대리인을 뜻하는 중국어) 노릇을 한다.

■거대한 안타까움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나림의 학병 3부작 중 가장 스케일이 크고 가장 역동적이다. 무엇보다 신분이란 전혀 색다른 요소가 가미되어 흥미를 배가한다. 나림의 작품답게 사실의 허구화와 허구의 사실화가 천의무봉으로 엮인 소설이다. 그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미완성 유작으로 그친 게 너무나 안타깝다. 이 작품은 계간지 ‘민족과 문학’ 창간호인 1989년 겨울호부터 1992년 봄호까지 2년 반 동안 10번 연재했다. 1부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도쿄 유학 시절, 2부는 상하이 시절 이야기다. 3부에선 해방 전후의 선택 이야기일 텐데, 가장 궁금한 대목에서 중단됐다.

같은 학병 이야기라도 ‘관부연락선’의 부끄러움과 ‘지리산’의 의분과 달리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는 증오 오기 복수 그리고 극적 변신이 있다. 나림의 학병 이야기에 다소 거리두기의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자기 반성문의 절절함이 덜하고, 더 소설 같다. 독자로선 그만큼 부담이 적고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그 작품이 미완성 유작이라니,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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