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르신 재치와 유머’ 시 공모전
- 8500여 편 작품 중 77편 엄선
- 김우현 작가의 그림 함께 엮어
- 삶의 통찰·지혜·사랑·혜안 담아
“저렇게 지는 거였구나/ 한세상 뜨겁게 불태우다/금빛으로 저무는 거였구나”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에 사는 73세 이생문 어르신의 시다. 제2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단 석 줄이지만, 한 사람의 생이 보인다. 인생의 황혼이 금빛 노을로 물들어 있어 더 깊고 아름답다. 시 옆에는 김우현 작가의 그림이 놓였다. 노년의 부부가 노을을 바라보는 뒷 모습이다. 보이지 않지만, 그 얼굴은 노을빛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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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완철 시 ‘흑백사진’의 삽화. 김우현 그림. 문학세계사 제공 |
‘꽃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아름답다’는 ㈔한국시인협회와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문학세계사가 주관한 제2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수상 작품집이다. 이 책을 보니, 지난해 1회 수상 작품집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즈음 두 번째 작품집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만큼 반가운 책이다.
전국과 해외에서 65세부터 100세에 이르는 어르신들이 8500여 편의 작품을 응모했다 (참고로 1회 때의 응모 편수는 5800여 편이었다). 그중에서 엄선한 77편의 짧은 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다. 본심 심사는 시인 김종해 나태주 김수복이 맡았으며, 공정한 블라인드 심사를 통해 오직 시 자체의 힘으로 선정된 작품들만을 담았다.
어르신들의 시는 짧은 형식 속에 삶의 통찰과 유머, 그리움과 사랑, 노년의 혜안과 따뜻함을 담아낸다. 시마다 그림이 장식하고 있어 예쁜 시집이다. 몇 편의 시 전문, 어르신 성함과 나이와 살고 있는 동네를 함께 소개한다.
‘인생 동반자’(이주석·69세·부산 동래구 안락동) “당신 손 맞잡고/ 구름 덮인 저 아득한 산 오늘도 오른다/ 당신이 끌어주고 내가 밀어주며 쉬엄쉬엄/ 내가 끌어주고 당신이 밀어주며 느릿느릿/ 도중에 손 놓고 하산할 요량으로 주저앉기도 했지만/ 저 아득한 산 팔 부 능선까지 올라왔으니/ 그렇게 오르다가 돌아서는 그 자리가 어디든/ 저 산 정상이다/ 바로 내가 기댄 당신이 정상이다” 산의 정상에 선 부부가 사람 사는 동네를 내려다보는 뒷모습 그림이 있다. 두 사람이 손 맞잡고 천천히 올라온 산길에는 꽃도 나무도 아름답고 튼실하게 자랐겠다.
‘바람 부는 섬’(박부경·78세·경기 양평군 양서면) “할매와 할배 등 돌리고 앉아 봄볕을 캔다// 빈 바구니에 보리죽 한 그릇 온 식구 갈라먹던/ 풀뿌리 같은 시절 구구절절 캐서 담고/ 다방 레지랑 눈이 맞은 꽃바람/ 콕콕 콕 콕 콕 호미로 쪼아댄다// 해묵은 시집살이/ 맨날 월세 독촉에 피가 마르던 셋방살이/ 드라마 줄거리 엮듯/ 들추고 또 들추며 울다가 웃다가/ 한평생 같은 하루가 저문다” 지나온 삶 구구절절 돌아보고 쓰다듬고 싶은 기억이 얼마나 많을까. 봄 들판에 나란히 앉은 백발 부부의 뒤에 살그머니 다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엿듣고 싶다.
가족 그림이 장식한 시 한 편도 보자. ‘흑백사진’(김완철·67세·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사진관 가자고/ 초저녁 잠든 오남매 깨우시는 아버지// 서강대교 비포장 뚝방길을 걷는/ 오남매 오리 떼가/ 졸 졸 졸// 전차가 서 있는/ 마포종점/ 삐거덕대는 사진관/ 펑 소리에 놀란 막내는 오줌 지린 날// 단 한 장 남은 흑백사진은 우리 가족의 역사” 세월이 지날수록 이 흑백사진은 귀한 보물이 됐을 것이다. 사진 속에는 아직 젊은 아버지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다섯 남매가 있다. 막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남매의 추억 속에서 영원히 사진 찍다 깜짝 놀라 오줌 지린 아이다. 흑백사진 그림은 우리에게도 묻는다. “집집마다 이런 사진 한 장쯤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