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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장자 같은 정신적 거인…너른 품과 인간미 재평가해야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29> ‘지리산’③ 작가를 위한 변명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5-04-27 18:52:48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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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산하 등 탄생시킨 대문호
- 금기와 엄숙주의 깬 진정한 외류
- 박식한 수준 정약용 비견할 정도

- 대학·문단에 무리 짓지 않아
- 인정 못 받고 기리는 이 적지만
- 작품 그 자체로 존중 받아 마땅

‘지리산’을 네 번 정독했다. 읽을수록 점입가경이다. 10대 20대 때 읽었던 느낌과 40대의 독감(讀感), 그리고 60대에 읽은 소회가 다 다르다. 매번 배우고 또 배운다. ‘지리산’은 이른바 학병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작품 ‘관부연락선’은 10대에 읽기 시작해 이 연재를 쓰기 위해 다시 읽기까지 대여섯 번 정독했다. 학병 3부작의 마지막 ‘별이 차가운 밤이면’도 최근 문화 강좌를 준비하며 다시 읽어 네 번 클로스 리딩(close reading)했다. 서평을 쓰려면 그 작품을 최소 세 번은 읽어야 하는 게 평론계의 기본 예모(禮貌)라고 들었다.
걸작 ‘지리산’(전 7권)은 작가 나림 이병주에 관한 관심과 평가가 여전히 절실히 필요함을 말해준다. 2006년 이병주 선생 14주기 때 경남 하동군 섬진강변 하동 포구의 이병주 문학비 앞에서 문학인과 유족이 참배하는 모습이다. 국제신문 DB
문학도 평론도 제대로 모르는 나는 서평은 언감생심, 독후감 한 줄 쓰기가 머리에 홈을 파듯 버겁다. 다만 나림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고 싶다. 나림학도로서 고민하는 대목이 하나 있다. 강호의 나림 마니아 제현(諸賢)께 묻고 싶고 함께 토론하고 싶다. ‘지리산’, 이 기막힌 소설의 작가 나림 이병주는 왜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할까. 나림은 이 소설 하나만으로도 위대한 작가인데 왜 응분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을까.

어디 ‘지리산’뿐인가. 한국 문단의 왜소함을 한순간에 분쇄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어떻고, 해방정국과 이승만 대통령 시대 12년을 망라한 사회과학 텍스트 같은 ‘산하’는 또 어떤가. ‘마술사’ ‘쥘부채’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등 슬프고 아름다운 중·단편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개인사와 시대사를 천의무봉으로 엮은 그 작품들은 이야기의 힘 즉 소설의 진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외류, 주류도 비주류도 아닌…

같은 해 서울서 열린 이병주 문학의 밤에서 이병주 작가의 책을 전시한 광경. 연설하는 이는 정구영 당시 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다. 국제신문 DB
나림은 대문호다. 대문호 나림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 내적 요인과 작가 외적 요인이 다 있다. 두 요인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사실 작가 평가에 내적 외적 구분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나림은 외류(外流)다. 외류란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니라는 뜻이다. 주류는 문자 그대로 중심인물이다. 번듯한 출신배경과 명문의 학벌로 어려서부터 특권의식과 소명감이 분명하다. 늘 앞장서고 가운데에 위치하며 자연스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무리의 리더가 된다. 주류는 세상을 지키는 부류다.

비주류는 능력과 개성만으로 버티는 부류다. 주류가 18 권법과 36 초식 등 정통 매뉴얼을 단단히 익힌 정통파라면, 비주류는 독특한 내공을 지닌 유니크 개성파다. 비주류는 세상을 바꾼다. 외류는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닌 자유인이다. 외류는 내 멋대로 사는 부류이며 자기 기준대로 사는 유형이다. 그 자유로움 때문에 사람의 크기와 넓이가 넉넉하다. 공자와 장자 같은 정신적 거인이 바로 외류적 인물이다. 나림이 사숙했던 사마천과 루쉰도 외류이고, 시선 이태백도 물론 외류다. 절세 미녀가 외롭듯, 품이 너른 자유인도 외롭다.

나림은 1970-80년대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지적 자극과 소설 읽는 재미를 준 희대의 작가다. 당시 독서 세대 중 나림의 작품을 많이 읽은 독자와 적게 읽은 독자의 차이는 있었으나 적어도 내 주변에 아예 읽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단에선 주류도 아니었고 비주류도 아니었다. 작가나 평론가는 나림을 외면했다. 남재희는 나림의 발인 때 갔더니 조사(弔辭)할 문인이 없어 자신이 얼떨결에 조사를 했다고 회고했다. 나림은 작가의 무리에 끼워주기엔 그릇이 너무 컸고,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법이나 문법은 이른바 순수 문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학에 순수 비순수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아마 대중소설이나 통속소설과 구분하고 싶었을 것이다. 금기와 엄숙주의를 단박 깨뜨려버린 나림의 글쓰기는 문단에겐 도전이었을 수 있다. 다만 독자로선 작품 완성도만 보고 판단하고 싶다. 과연 나림의 삶과 글은 거침없었고 드라마틱했으며 자유분방했다. 나림은 한마디로 외류였다. 진정한 진보는 아웃사이더다.

■나림이라는 ‘당대의 AI’

둘째, 나림은 정을 중시하고 의리를 지켰으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인연을 대했다. 언론인 시절 신세 졌던 회사를 위해 “쪽 팔린다”는 주위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생 오가피주 TV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콧수염 기른 중년 나림이 불콰하여 술병을 들고 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나림의 인적 네트워크는 문자 그대로 ‘청와대 주인부터 서울역 지게꾼까지’ 깊고 넓었다.

선배를 잘 모셨고 친구에게 베풀었으며 후배와 제자에게 너그러웠다. 정치적 입장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았고, 유불리를 따져 인간관계를 맺지 않았다. 명백한 불리를 감수하고도 인간적 도리를 지키다 손실을 보거나 오해를 산 경우가 많다. 힘 떨어진 독재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눈치 보지 않고 도와주기도 했다. 과정에 적지 않은 사람이 나림을 경원하고 떠났다.

셋째, 나림은 그 당시의 AI(인공지능)였다. ‘지리산’ 박태영의 성향과 관련 막심 고리키를 등장시키고, 사상적 고뇌 과정엔 마르크스 저술과 앙드레 지드의 ‘소련 기행’을, 최후 대목에선 시인 로르카의 유언을 인용한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박달세가 노예 의식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대목에선 프레데릭 더글러스의 ‘어느 미국 노예의 얘기’를 소개한다. 박달세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으로 사는 이중 삼중 인생을 해명하기 위해 일본인 중국 배우 리샹란(李香蘭 야마구치 요시코)과 비견하기도 한다. ‘바람과 구름과 비’의 최천중과 그 친우들을 위해선 시간과 공간에 꼭 맞는 한시를 뽑아낸다. ‘행복어 사전’ 서재필의 지적 좌충우돌에는 셰익스피어, 니체, 오스카 와일드가 등장한다. ‘장자에게 길을 묻다’에선 맹자와 장자를 단 위에 올려놓고 도덕과 자유란 주제의 대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아직 개인용 컴퓨터나 챗GPT가 없던 시절, 나림은 ‘넘사벽’이었다.

시인 허만하는 그런 나림을 서랍에 비유하여, “이 서랍을 열면 이런 지식이, 저 서랍을 열면 저런 지식이 마구 쏟아진다”고 상찬했다. 김언종은 근 300년의 3대 박식가로 이가원과 정약용, 그리고 이병주를 꼽고 “당대 영향력으로 따지면 이병주가 정약용보다 더 낫다”고 극찬했다. 다만 이렇게 칭찬하는 문사보다는 시샘하고 비방하고 폄훼하는 부류가 더 많다는 게 현실이다.

넷째, 나림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태작(駄作) 문제가 있다. 88권 소설 중 적어도 10권은 나림의 작품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형편없다. 워낙 다작에 태작들이 섞이면서 한때 비서가 대필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나림은 “프로페셔널 작가는 무슨 글이든 써야 하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주문 생산자”라고도 했다. 이런저런 인연의 글 빚을 갚느라, 그리고 체면 유지와 여러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질 떨어지는 작품을 일필휘지로 써내기도 했다. 퇴고를 거듭하는 과작(寡作)의 작가라면 질겁할 일을 나림은 태연히 해온 것이다.

■큰 사람, 넉넉한 사람, 열린 사람

다섯째, 나림은 무리 짓거나 문권(文權)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른바 ‘나림 사단’이라고 해서 언론인 시절 동료와 감방 동기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문단에서 졸개(?)를 키우지는 않았다. 여러 문학상 심사 위원으로 많은 문인에게 수상 기회를 주었지만, 티 내지 않았고 하물며 줄 세우는 일은 더욱 없었다. 배타성 강한 문단에서 굳이 자기편을 만들지 않았다. 대학과 문단에 뿌리가 없는 작가다. 요산 김정한의 경우 ‘지역구’에서 제자들이 스승의 성취를 활발하게 선양하고 있다. 범어사역 앞에 요산의 글들이 전시돼 있고, 요산 길도 조성됐다. 전국구이고 글로벌 작가인 나림 읽기와 연구도 지금보다 훨씬 활발해져야 한다. 몇 편 박사 석사 학위 논문으론 여전히 아쉽다. ‘에낭풍물지’의 공간 자갈치에 나림의 아포리즘을 새긴 비석과 흉상이 세워지길 기대한다.

나림은 아끼는 친구들을 위한 의분(義憤)으로 ‘지리산’을 썼다. 나는 그 ‘지리산’을 읽고 또 읽으며 작가 이병주를 위한 의분을 느꼈다. 나림이 즐겨 쓰던 표현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대로 섭리는 성긴 것 같아도 결국 빠뜨리지 않고 작동한다. 나림이 감당해야 할 섭리는 그대로 감당해야겠지만 인정 또는 오지랖, 그리고 자유분방함과 실수 때문에 그 당당한 성취조차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나림에게 성자나 위인을 바라지 않는다. 그의 너른 품과 따뜻한 인간미, 그리고 기막힌 작품이 그 자체로 평가받기를 바랄 뿐이다.

나림을 위한 변명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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