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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36> 선비의 어물, 문어(文魚)

代 잇기에 진심이며 겸양지덕까지…옛 사대부가 사랑한 물고기

  • 최원준 시인 ·음식문화칼럼니스트
  •  |   입력 : 2024-04-09 18:43:53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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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는 대문어, 남해는 참문어
- 경상도 잔치·제사·명절 필수음식
- 전라도 홍어처럼 귀빈에 대접

- 숙회·산적·백숙 다양한 조리법
- 깔끔한 단맛 동의보감 등에 등장
- 제주·전남 보양식 죽으로 즐겨

- ‘문어 통닭’이나 ‘통문어 짬뽕’
- 버터 발라 구워 먹어도 일품
- 포항 죽도시장 미식가들 북적

어린 시절, 집안 제례(祭禮)가 일 년에 여러 번 있었다. 명절 차례와 몇몇 기제사를 더하면 한 달에 한 번꼴은 조상 모시는 시간을 가졌다. 생전 할아버지께서는 제례 때마다 말린 문어에 수를 놓듯 정갈한 가위질로 꽃 모양, 봉황 문양 등을 새기고 오려 제사상에 진설하셨다.

문어 다리를 가위로 요리조리 오려내다 보면 어느새 꽃 한 송이가 풍성하게 피어오르고, 봉황이 큰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어린 눈에도 할아버지의 손길은 마법과 같아서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문어오림, 어물 새김, 어화(魚花)’라고 불리는, 조상께 올리는 제물(祭物)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먹음직스러운 문어숙회. 통째 삶아 얇게 저미듯 썰어 참기름이나 초장 등에 찍어 먹는다.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선비의 물고기, 제사·잔칫상 올라

한때 경상도 지역 반가에서는 가문의 큰 덕목 중 하나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었다. 평소 조상들이 즐겨 드시던 음식을 차려놓고 온 성심으로 감사의 예를 올리고, 멀리서 온 인척이나 빈객들에게 음식 접대하는 일을 대단히 중요한 미덕으로 여겼다.

이때 꼭 빠져서는 안 되는 식재료, 음식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전라도 홍어와 경상도 문어였다. 특히 경상도 문어는 삶아서도 내고 산적으로도 올리고 문어오림으로도 냈다. 그리고 탕국에도 넣어 진하고 감칠맛 나는 해물 탕국으로 끓여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경상도 지역의 제사나 잔칫상에는 이 문어가 긴요하고 다양하게 쓰이게 됐을까? 이는 성리학을 숭배하던 사대부가들이 이 문어를 통해 성리학의 규범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어는 후손을 잇기 위해 제 신명을 다하기로 유명하다. 혼신의 짝짓기 후 수놈은 곧바로 제명을 다하고, 암놈은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며 알을 지키고 보살피다 그 생을 마감한다. 대를 잇는 눈물겨운 분투가 우리 인간과 많이 닮았다.

이뿐만 아니라 문어는 습성상 바다 깊이 숨어 은인자중하기에, 선비들 수행의 덕목 중 자신을 쉬 드러내지 않는 겸양의 언행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문어는 먹물을 몸에 지니고 있기에, 늘 글을 가까이하는 선비들과도 비교되는 어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물고기가 아니면서도 ‘고기 어(魚)’ 자를 붙이고, 먹물을 지니고 있어 ‘선비들의 물고기’, 문어(文魚)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문어의 여덟 개 발이 여덟 정승을 배출하고 자손을 번성케 한다고 믿었고, 문어의 많은 발과 빨판이 재물을 끌어모으는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동해안 ‘대문어’ 남해안 ‘참문어’

문어는 전 세계적으로 300여 종이 있는데, 우리나라 해역에서는 2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동해안 냉수대에서 주로 잡히는 ‘대문어’와 따뜻한 남해의 전 연안에서 잡히는 ‘참문어’가 그들.

동해의 대문어는 문어 중 가장 큰 몸집을 가지고 있는 놈이다. 큰놈은 길이가 3m에 50㎏이 넘는다. 이렇게 큰놈들을 동해안에서는 ‘대왕문어’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이 대문어는 몸 색깔이 짙은 빨간색이라 ‘피문어’라고도 불리며, 껍질을 벗겨 놓으면 하얀 살이 드러나기에 ‘백문어’라고도 불린다.

남해에서 잡히는 참문어는 대문어에 비해 그 크기가 작고 몸 빛깔은 회갈색이다. 다 자란 놈이 3~4㎏이다. 몸집이 작다고 ‘왜문어’라 불렸다. 연안 돌 틈에서 서식하기에 ‘돌문어’라고도 불린다. 원래 ‘왜문어’로 불리던 것을, 의미가 좋지 않아 쫄깃쫄깃 식감이 좋고 맛있다고 ‘참문어’로 바꿔 부르고 있다.

이 문어는 주로 통발과 낚시로 잡는다. 강원도에서는 대문어를 원줄 사이사이에 낚싯바늘을 단 가짓줄을 달아 문어를 낚아내는 주낙 어업으로 잡는다. 그 지역 말로 ‘문어지가리’라고 부른다. 한때는 돼지비계를 낚시에 달아 문어를 유인해 잡았다고 한다. 배 한 척에 40여 개의 지가리를 가지고 조업한단다. 요즘은 큰 통발로 기계 힘을 빌려 대형 문어를 잡기도 한다.

참문어는 주로 통발로 잡는다. 통발에 고등어 정어리 등 비린내가 많이 나는 생선을 넣어두고 문어를 유인한다. 예전에는 단지로 잡는 단지 어업으로 어획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동물백과사전 격인 ‘전어지’에는 ‘문어를 잡는 데는 노끈으로 단지를 옭아매고 물속에 던지면 얼마 뒤에 문어가 스스로 단지에 들어간다’고 기술하고 있다.

■문어숙회부터 통닭까지

얇게 썬 문어숙회 한 접시.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문어를 다양한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다.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기도 했거니와 특히 경상북도 지역의 제사상이나 큰 잔치, 명절 음식 등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음식이었다. ‘규합총서’에는 ‘돈 같이 썰어 볶으면 그 맛이 깨끗하고 담담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의보감’에서는 ‘성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고 쓰여있다.

문어 음식으로는 문어 한 마리를 통째 삶아, 얇게 저미듯 썰어서 초고추장이나 소금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 ‘문어숙회’가 대표적이다. 경북 지역에서는 이 문어숙회를 마을 사람 모두와 함께 나눠 먹는 잔치 음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경북 안동지역은 ‘문어 산적’과 ‘문어 탕국’으로 먹고, 전남 제주지역에서는 보양식으로 문어죽을 즐긴다. 여름철 기력 보충을 위해 문어백숙도 널리 먹는다. 주당들에게 사랑받는 매콤한 ‘문어 고추장불고기’나 ‘문어 두루치기’도 좋다. 식도락가들은 회로도 즐긴다.

요즘은 간식으로 버터를 발라 굽는 ‘문어 버터구이’와 꾸득하게 말려 먹기 좋게 잘라 씹어먹는 ‘문어절편’도 있다. 제주에서는 통닭과 함께 문어를 튀겨낸 ‘문어 통닭’이란 퓨전음식도 선보이고 있다. 전국 해안지역에서는 문어가 통째 들어간 짬뽕도 유행이다.

■포항 죽도시장 문어골목의 유혹

경북 포항 죽도시장에 늘어선 다양한 크기의 문어들.
얼마 전 봄을 맞아 포항 호미곶에서 하루를 묵었다. 당연히 포항의 명물 문어를 포항 죽도시장에서 한 마리 사 일행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그런데 늘 죽도시장 수협공판장 옆 골목에만 들어서면 고역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금방 삶은 문어들이 줄줄이 걸려있는 ‘문어 골목’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문어를 전문으로 팔면서 직접 삶아주는 문어집이 10여 곳 모여 ‘문어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수조마다 큰 문어가 가득 들어있고, 들큰하면서도 구수한 문어 삶는 냄새가 사람 코끝을 자극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유혹이다.

아직은 바람 드센 호미곶의 밤. 갓 삶아 따끈한 문어는 일행의 몸과 마음을 데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문어는 따뜻하게, 차갑게,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따뜻할 때는 부드럽고 차가울 때는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여기에다 따끈한 청주도 좋고 걸쭉한 막걸리도 잘 어울린다. 과연 선비이거나 한량이거나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겠다.

한때 사대부 가문에서 널리 사랑받던 선비 음식 문어.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조상을 모시는 제례에도 빠져서는 안 되는 식재료가 문어였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 뼈 없는 어물을 제물로 올리는 것만 봐도, 반가에서 특히 좋아하고 즐겨 먹었을 법하다. 그 전통이 오늘에도 이르러, 아직도 문어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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