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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림과 그의 롤모델 사마천, 고난에 굴하지 않은 기록자들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2> ‘이사마’의 스승 사마천①

  • 조광수 정치학 박사·전 한국아나키즘학회장
  •  |   입력 : 2024-03-24 18:51:40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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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을 ‘이사마’라 할 정도로
- 사마천을 깊이 흠모한 이병주
- 한무제 노여움 사 궁형 받은 뒤
- 위대한 역사서 ‘사기’ 완성하고
- 그로 인해 다시 형벌받은 사마천

- 필화와 옥고 잇따라 겪은 나림
- 기록해야 후대에 남는다고 한
- 정신적 스승에 ‘동병상련’ 감화

- 신뢰할 수 없는 역사의 빈자리는
- 문학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어

사마천의 고향인 중국 산시(陝西)성 한청(漢城)시에 사마천의 동상이 서 있다. 국제신문 DB
누구에게나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른바 롤 모델이다. 기록자 문학을 작정한 이병주의 롤 모델은 ‘사기’를 쓴 사마천이었다. 기록문학의 걸작 ‘그해 5월’에서 나림 이병주는 자기 분신으로 ‘이사마’를 등장시킨다. 이사마는 이병주 스스로 취한 필명이다. 기꺼이 이병주식 사마천이 되기를 다짐한 것이다.

나림이 ‘사기’를 처음 접한 것은 성환혁이란 선비 덕분이다. 선비라는 말의 가장 좋은 의미와 어감에 꼭 알맞은 인격과 자질을 갖춘 분이다. 위당 정인보가 “해동 유일의 청사(淸士)”라고 상찬했다. 이병주에겐 처외숙 되는 어른이기도 하다. 인상 깊은 대목은 그가 해인대학 강사로 명강의를 펼쳤으나 오래지 않아 사임하며 했던 말이다. “아이들은 엿을 달라고 하는데 내게 줄 것이란 술밖에 없다.”

성환혁이 원문 3함(函) 26책(冊) 전질 ‘사기’를 들고 와서 “신학문 하는 사람이라도 ‘사기’쯤은 읽어둬야 하네. 서양인에게서 배우는 게 있다면 서양인에게 가르쳐주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가 간혹 와서 거들어 줄 테니 읽어보도록 하게”라고 권했다. 당시엔 학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그 호의를 놓쳤다. 해방정국 때 일이다. 후회막급이었다.

■성환혁·다케다 다이준을 거쳐

유명한 ‘사기의 세계’를 저술한 일본 작가 다케다 다이준. 위키피디아
이후 나림은 두 번의 결정적 계기로 ‘사기’를 읽게 된다. 우선 다케다 다이준의 ‘사기의 세계’를 읽은 충격이고, 다음 영어(囹圄)의 신세가 된 운명 때문이었다.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 해설은 단연 압권이다. ‘사마천은 삶으로 치욕을 견딘 남자다’로 시작하는 서문은 박력 있다. 그가 ‘사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의 격심한 현장을 누비면서다. 전쟁터에서 현실의 가열(苛烈)함, 역사의 가열함, 세계의 가열함을 생각하며 오랜 세월 살아남은 고전의 강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기’에 근거가 될 만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 귀국 후 사마천에 집중한다. 다케다는 ‘쾌락’으로 일본 문학 대상을 받은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중국과 일본 역사책으로 교육받고 도쿄제국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한 학력이 있다. 한학 공부가 싫어 대학을 중퇴하고 반전평화 운동을 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에서 전쟁 체험을 한 것이 계기가 돼 다시 고전을 연구한다.

작가가 되려면 역시 자기만의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한다. 나림은 다케다의 그 상황을 “이렇게 해서 하나의 명작이 햇빛을 보게 된 셈인데, 이것은 또한 고전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이며 그 새로운 정신만이 고전을 개발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끔찍한 형벌을 받은 뒤 울굴한 마음을 이겨내려고 무서운 집념으로 ‘사기’를 썼다. 사마천에게 쓴다는 것은 기록한다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한과 혼을 담아 가히 다시 없는 문사일체(文史一體) 기록을 남겼다.

사마천이 ’사기’에 쓴 ‘태사공 자서’ 한 대목이다. “주 문왕은 은나라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주역’을 만들었다. 공자는 진나라에서 곤액을 당할 때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조정에서 추방되자 ‘이소경’을 지었고, 좌구명은 장님이 되고서 ‘국어’를 만들었다. 시 삼백 편도 거의 성현의 발분(發憤)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들 울굴함을 풀 길이 없어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굽어보게 된 것이다.” 그런 심정에 공감하며 나 사마천도 ‘사기’를 썼다는 고백이다.

■사마천을 만난 이사마

대만 국가도서관이 소장한 사마천 ‘사기’ 옛 판본.
여기에 ‘이사마 자서’를 가상해 한 대목 보태자면 “이병주는 필화를 겪으며 교도소에서 기록자 문학을 작정하고,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단숨에 썼다. 그 발분으로 100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지었다”로 되지 않을까 싶다. 나림은 5·16 직후 부산 영도경찰서 유치장에서 ‘사기’를 읽기 시작했다. 성환혁이 준 원서는 전쟁의 난리에도 온전히 보관하고 있었으나 우선 일본어 번역으로 읽었다. 유치장 2개월 반 동안 일역을 완독하고, 서대문 형무소로 옮긴 뒤 원서를 차입했다.

역시 한서(漢書)는 원문으로 읽어야 맛이 난다. 억울하게 궁형을 당한 운명의 인간이 쓴 책을 억울하게 10년 형을 받은 인간이 읽고 있다는 상황은 세월을 넘는 공감을 일으켰다. 인사(人事))와 세정(世情)엔 공간 차이도 없고, 중요한 문제는 현재나 과거나 똑같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기며 역사에 나름 개안(開眼)한다. 동시에 기록자로서 엄격한 각오와 어떤 시련이라도 결국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는 다짐도 한다.

나림의 ‘사기’ 읽기는 사마천이 ‘남근을 잘린 남자의 몰골로’ 단좌(端坐)하여 저술에 몰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대목에서 기록자의 처절한 각오로 이어진다. 사마천이 본격적인 저술에 착수한 건 기원전 104년이고,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으로 죽음을 면한 건 기원전 97년, 저술을 완성한 것은 기원전 91년이다. 종이도 만년필도 없던 시대다. 흐릿한 호롱불 아래에서 대를 쪼개 엷게 다듬은 죽간에다 모필로 한 자씩 새겨 130권 2부를 만든 것이다.

1부는 태산에 보관하고 1부는 황제에게 진상했으나 한 무제는 내용에 대노하며 죽편 꾸러미를 내동댕이쳤고, 사마천의 관직도 파면했다. 절대권력자를 위인전이나 영웅전으로 쓰지 않고 온갖 약점을 가진 존재, 특히나 신비주의에 빠져 술사와 점사를 우대하고 신선술에 영일이 없었다고 적시했으니 황제가 노발대발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사마천은 필화를 당하고도 기록에 목숨을 건 것이다.
중국 시안 화청지에 있는 한무제 조형물.
■역사의 빈곤을 채우는 문학

당대에는 황제의 힘을 이길 길이 없으나 기록은 후대까지 읽고 또 읽을 것이니 과연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한번 겨뤄보자는 자신감과 복수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2000년이란 시간을 격해 깊은 공감을 느낀 나림의 고백이다. “그러니 ‘사기’는 나에게 성서이고 사마천은 나에게 결정적인 스승일 수밖에 없다.” 기록자는 써야 할 것과 쓰지 않아도 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써야 한다고 결정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써야 한다. 기록자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실례를 사마천은 ‘제태공 세가’에 이렇게 기록했다.

“제나라의 권력자 최저가 임금 장공을 죽였다. 사관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최저는 그 사관을 죽였다. 사관의 동생이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다시 썼다. 최저는 그 동생도 죽였다. 그 아래 동생이 또 똑같이 기록했다. 최저도 차마 세 번이나 죽일 수는 없었다. 세 명의 형제가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기록을 지킨 것이다.” 사관은 기록자다. 사관이 붓을 들지 않으면 이 세상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 다만 기록만 해두면 후대까지 남는다.

나림은 역사 앞에 겸손하지만 역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백하다. 마르크 블로크가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탄식했듯 역사란 인류의 어리석음이 되풀이된 과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이 역사학계 영웅으로 대우하고 성자로 추앙하는 마르크 블로크는 조국 프랑스가 독일에 패해 파리에 나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며 “난리를 당한 원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마음속으로 물었다. 역사가 우리를 속인 것은 아닐까” 자문했다. 유사한 참사를 거듭 겪으면서도 역사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인간의 아둔함 앞에 역사의 무력함을 통감한 것이다.

마르크 블로크는 50대 중반에 소르본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레지스탕스에 참전하다 처형된다. 그럼에도 역사는 쓸모가 있다. 나림은 ‘행복어 사전’ 속 소설가 지망생 서재필을 통해 말한다. “허망하다고 무용한 것은 아니다. 허망이야말로 인생의 실질이고 역사의 실질이다. 역사로서도 부족하고 신문 기사 기록으로도 부족한 그 무엇을 위해 문학이 있다.” 현자는 역사를 즐겨 읽지만 믿지는 않는다. 신뢰할 수 없는 역사의 빈곤을 채우는 게 소설의 역할이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나림의 문학론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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