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늦은 여름, 비고(M. Bigot)라는 프랑스 특파원은 그해 7월 발발한 청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조선 제물포(인천)로 가기 위한 경유지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개전 초기 전쟁 상황과 부산에서의 일상을 담은 4장 분량 원고와 삽화 7컷을 ‘르 몽드 일러스트레(Le Monde Illustre)’에 게재했다.

영도와 용미산을 배경으로 한 부산항 삽화(1894년). 부산박물관 제공

“외관상 다소 슬픈 작은 부산항, 민둥산과 4개월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아 건조한 날씨, 이에 따른 식수난, 1200가구와 5000명이 거주하는 일본인 전관거류지, 도시를 감시하는 일본 순찰대, 온화하지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조선인, 청국과 동학혁명군의 동태” 등을 서술했다. 그가 스케치한 삽화에도 “굶주리고 헐벗은 조선인,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기리는 서울의 개선문 전경, 영도와 용미산을 배경으로 한 부산항, 동래감리서 앞에서 포즈를 취한 프랑스 특파원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동래감리서(대동관) 앞 프랑스특파원 비고(1894년). 부산박물관 제공

프랑스 기자가 남긴 삽화는 아이러니하게 우리 선조가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포착했다. ‘강제 개항과 전쟁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었던 1894년의 용미산(현재 롯데백화점 광복점) 아래 조그만 포구 부산항, 중앙동 지역의 생소한 해변과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래감리서 전경이 그것이다.

부산항과 동래감리서 공간에는 부산의 역사, 더 나아가 대한민국 역사의 부침이 겹겹이 배어있다. 중앙동 일대 낯선 해변은 일제에 의해 대륙침략과 경제 수탈의 항만시설인 부산항으로 변모했고, 피란수도 당시에는 유엔군 군수물자와 구호품 등을 하역·보급하는 후방병참기지 역할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우리나라 제1수출항으로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견인한 역사적 장소이며, 눈물과 희망으로 힘겨운 삶을 이겨낸 민중과 함께 호흡한 부산과 대한민국 역사의 상징적 공간이다.

동래감리서(현재 봉래초등학교) 자리는 1678년 이후 약 200년간 조선에 온 일본 사신들이 역대 조선 국왕의 전패(殿牌)에 숙배(肅拜)를 올리는 의례공간 초량객사로 사용된 역사적 공간이다. 1883년 개항장의 무역·재판·세금징수 등 외교통상업무와 재외 거류민 업무를 시행하고자 동래감리서가 설치됐지만,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1906년 폐쇄됐다. 조선 정부의 외교공간이었던 동래감리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주춧돌이 된 우리가 반드시 반추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역사공간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소설을 끄집어내 본다. 첫 페이지에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어’라는 문구와 함께 1910년 ‘영도’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이 문구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선진 국가로 견인하는 데 일조한 부산의 공간과 부산 사람들에게도 매우 적합하고 압축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적인 역사 공간은 현재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필자는 상상해 본다. 또 1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서기 2150년 어느 날 부산, 미래의 한 역사학자가 들추어낸 21세기 초 부산 모습을 다룬 기사에서 외국인 기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방탄소년단 정국과 지민의 고향인 부산은 국제영화제가 매년 개최되는 도시이다. 전 세계 아미(ARMY)들과 영화마니아뿐만 아니라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K-푸드와 K-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해마다 부산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내륙과 해양문화가 혼합되어 형성된 해양도시 부산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과 역사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도시 부산’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고….

*르 몽드 일러스트레(Le Monde Illustre)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삽화 뉴스잡지, 1857~1940년, 1945~1956년까지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