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단서 “현대적이고 세계적” 호평

‘브로콜리 열반’을 눈여겨보게 된다. 박진형 시조시인은 첫 대목을 이렇게 시작한다.

첫 시조집을 낸 박진형 시조시인.

‘옹다문 봉오리로 꽃대를 밀어 올려/ 온몸에 스민 얼룩 연두 방울로 닦아내면/ 꽃순은 아이의 미소로/ 볼록한 빛깔 된다’. 브로콜리 이미지를 ‘볼록한 빛깔’로 절묘하게 표현한 뒤 두 번째 수는 짐짓 이렇게 잇는다. ‘처음 만난 녹색 물결 부들부들 곡선미/ 흔들리는 꽃자리 미혹을 어루만질 때/ 둘레에 아무도 없다/ 나를 만난 오백 나한’. 상상해보자면, 마트에서 카트를 몰며 장을 보던 중년 남성이 브로콜리 더미 앞에서 문득 멈춰선 모습이 떠오른다. 둘레엔 아무도 없고, 오돌토돌 브로콜리는 ‘오백 나한’ 같다.

이 시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초록색 꽃봉오리 상큼해 눈 감는다/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천 개의 미소/ 누추함 벗어던지고/ 날아오르는 꽃숭어리’. 날아오른 게 오백 나한인지 브로콜리인지 시인 자신인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텐데 어쨌든 천 개의 미소는 누추함을 벗고 날아올랐다. 이 시조는 일상을 환하게 뒤흔든다. 현대시조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조시인 박진형이 첫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책만드는집 펴냄)를 냈다. 그는 2016년 ‘시에’에 작품을 발표했고,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됐다. 박진형 시조시인은 ‘언어’의 영역에서 독특하고도 깊이 있는 이력을 쌓았다. 서울대에서 불어교육학을 전공했고, 불어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외국어교육과에서 박사를 수료했다. 불문학·어학·문학을 두루 공부한 그가 한국의 ‘시조단’에 나타났을 때 많은 이가 주목했고 그는 성실하고도 돋보이는 시조 창작으로 화답했다.

이 시조집에 해설을 쓴 이경철 문학평론가는 박진형의 시조에 관해 이런 표현을 썼다.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시로 나가려는 시조의 노력.” “잘 벼린 마음과 시로 이국적인 요소도 껴안는 시조.” “역사와 현실 의식의 내밀한 서정화로 공감대 넓혀.” 수록 작품 ‘녹’을 옮겨본다.

“쇳기를 풍기며 피어나는 푸른 녹은/ 한때의 윤기를 돌이키지 않는다/ 갈수록 깊어지는 빛 속살을 드러낸다// 돋아난 검붉은 꽃 서서히 잦아들어/ 모래알 같은 심장에 비수가 꽂힐 때/ 상처는 번져가면서 속울음 피워낸다// 허물어진 뿔 뒤에 월계관이 기다린다/ 한창때 열기 사라져 미련을 덮으니/ 불멸로 피어난 열매 천년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