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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55> 금오신화-매월당 김시습(1435~1493)

불우한 시대에 던진 일침…천재 방랑문인의 조선판 판타지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2-12-15 19:11:04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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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이 인정한 매월당이 저술
-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집
- ‘이생규장전’등 단편 5편 수록
- 사후세계 등 비현실 넘나들며
- 운명 맞서는 도전과 의지 녹여
- 민중 아픔 담고 패도정치 질타

두 가닥 오라를 진 고전이다. ‘우리나라 첫 한문 소설’이고, 신이한 내용을 담은 ‘15세기 전기(傳奇) 소설’이라는 오라다. 대부분 한국인이 머릿속에 그렇게 묶어 두고 정작 읽지는 않는 고전.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그렇게 피가 제대로 돌지 않게 둬서는 안 되는 값진 우리 문화 자산이다. 분량이 적고 서사가 간명해 이해하기도 쉽다. 읽는 게 오라를 푸는 길. 운문이 산문을 끌어가니 서정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고전에 뿌듯해진다. 당대 민중이 겪는 아픔을 어루만지고, 패도 정치를 질타하는 날카로운 사회성에 감탄한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무량사의 극락전과 보물 185호 5층석탑, 보물 233호 석등. 매월당 김시습은 1493년 이곳에서 59세로 눈을 감았다.
매월당(梅月堂)은 생후 여덟 달 만에 글을 깨쳤다. 세 살 때 하인이 맷돌에 보리를 가는 걸 보자 시를 지었다. ‘무우뢰성하처동 황운편편사방분(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비도 오지 않는데 어디서 천둥소리가 울리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날리네’. 그는 5세 때, 세종 어명으로 승정원에 불려가 글솜씨를 인정받는다. 세종은 “잘 키워서 크게 쓰리라”하며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리며 재주껏 가져가랬다. 어린 문사, 비단을 연결해 끌고 갔다고 한다. 이런 영특함으로 오세(五歲)란 별명을 얻었다. 부여 무량사 김시습 부도 묘비에 ‘오세김시습지묘(五歲金時習之墓)’라 새겨졌다.

김시습이 지은 소설 ‘금오신화’.
과거를 치렀다면 장원급제할 글솜씨가 5편에 드러난다. 모두 독립한 얘기인데 다양한 주제를 가졌다. 읽는 이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건 서사가 탄탄하다는 얘기. 실존주의 눈으로 보면 ‘유한한 인생과 가혹한 운명에 맞서는 도전과 의지’가 읽힌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통과 대적한 용감한 매월당. 유독 기행과 일화가 많은 이유가 이해된다. 재능과 포부는 넘치는데 시대가 받아주지 않으니 삶이 파란만장할 수밖에. 꿈꾸다 죽다, 몽사(夢死)란 한 단어만 묘비명으로 새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뿌루퉁해 보이는 자화상, 자신을 비하하는 자찬 시에서 불우한 천재 문인을 본다. 5편 소설 주인공 말로도 그렇다.

첫째 얘기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남원 만복사에서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사는 총각 양생(梁生)과 낭자 영혼이 펼치는 씁쓰레한 사랑을 보여준다. 양생은 불상 앞에서 윷놀이와 비슷한 저포 노름을 벌여 이기자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 달라고 빈다. 그는 소원대로 처자를 만나지만 그녀는 변방을 침입한 왜구에게 목숨을 잃은 혼령. 양생과 그녀, 초청받은 이웃 네 여인 영혼이 한시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매월당은 뛰어난 시인이다. 기이한 얘기와 시가락이 어우러져 빚는 서정성이 참 묘하다.

둘째 얘기,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중국 원나라 도적으로 고려를 침입한 홍건적에게 부인 최 씨가 죽어 생이별한 남편 이생(李生)이 아내 영혼과 재회하자마자 이별한다. 무대는 옛 개성인 송도다. 제목은 ‘이생이 담장 너머를 엿보다’라는 뜻. 열여덟 살 이 도령은 국학으로 글공부하러 가면서 최 씨 집을 항상 지나친다. 담장 너머서 시를 읊는 별당 아씨(최 씨)를 엿본 후 그리됐다. 그녀는 시를 잘 짓고 당차다. 저자는 남녀를 평등하게 대한다. 모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일까. 혼령이 된 부인 최 씨가 남편에게 건넨 말. “이제 추연(鄒衍)이 피리를 불어 적막한 골짜기에 봄바람을 일으켰으니 저도 천녀(天女) 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듯 이곳으로 돌아오렵니다.” 도교 냄새가 물씬 난다.

셋째 얘기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다. 1457년 개성, 세조 때다. 홍 씨 성을 가진 유생이 술에 취해 부벽정을 찾았다. 이곳은 옛 유적지로 영명사 내 명승지. 그는 절경을 대하자 시흥에 겨워 시를 읊는다. 손뼉 치고 춤도 췄다. 제목(‘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 그대로다. 그때 한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기자조선 왕녀인 그녀는 놀라 몸을 숨긴 홍생을 찾아내 술 한 잔 권하고 시로서 화답한다. 5편 중 문학이 뿜는 향기가 가장 강렬하다. 얼씨구나 홍생은 은나라 임금의 후손인 선녀와 황송해하며 시를 주고받는다. ‘외국인 혼령’인 그녀가 즉석에서 거침없이 써 내려간 시. ‘부벽정 달 밝은 밤에/먼 하늘에서 맑은 이슬 내렸네/…지미(知微)와 함께 달구경하고/공원(公遠)을 따르며 놀고 싶어라….’ 지성과 미모를 갖춘 혼령에 홍생이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넷째 얘기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1465년(세조 11) 경주 사는 박생(朴生)이 남염부주에 가서 겪은 일을 보여준다. 고대 전설 속 섬나라다. 나라 전체가 항상 불에 활활 타며 공중에 뜬 저승 세계다. 제왕 염마(閻摩)가 홍생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간신배를 비웃고, 대담하게 주공 공자 석가를 논하며, 어지러운 삼강오륜을 까발린다. 사상가 매월당이 박생과 염마의 입을 빌렸다. 시대가 내친 방외인(方外人, 세속을 벗어난 이). 염마는 정직하고 뜻이 굳센 박생을 ‘벌판에 버려진 형산 옥’이랬다. 그 뜻을 당세에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면서 자기 대신 이곳을 맡아달라고 청한다. 저자는 소설에서나마 청운을 펼쳐본다.

마지막 얘기인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전편들보다 분위기가 경쾌하다. 고려 시대 송도(松都, 개성)에 사는 유명한 문사인 한생(韓生)이 천마산 박연 폭포를 찾았다가 용궁으로 초대받는다. 용왕은 그를 상석에 모신 후 청을 내놓는다. 결혼한 딸이 살 집을 지었는데 멋진 상량문이 필요하니 써 달라는 부탁. 글을 짓는 동안 연회가 흥을 더해간다. 게 거북 대신이 나와 시를 읊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춰 좌중은 배꼽이 빠진다.

이런 비현실은 현실 속 고통과 소망을 반영한다. 허황하지만은 않다. 지명이나 시대를 ‘국산’으로 짜 비현실 분위기를 덜었다. 고려조~조선 전기, 남원 개성 같은 우리나라 안에서 엮어낸 ‘새로운 얘기(新話)’다. 문제작이었으니 호불호가 엇갈렸다. 주로 젊은 선비들이 즐겨 읽었다. 조선 전기엔 필사본이 꽤 나돌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소실되고 간행이 드물어 중기 이후엔 희귀본이 됐다. 일본에서 1653·1884년 목판본으로 나왔고 이게 한국으로 전해져 1927년 잡지 ‘계명’(최남선 발행) 19호에 실렸다. 금오신화는 잊혔다가 다시 빛을 본 고전. 1999년엔 중국 다롄도서관에서 윤춘년(조선 중기 문신) 필사본이 나왔다. 작품 유랑이 저자와 닮았다.

이 고전은 매월당이 30대에 경주 금오산(현재 남산) 용장사 금오산실에 7년여 칩거해 썼다. 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켰다. 19세 저자는 과거 수험서를 불사르고 승려(법명 설잠, 雪岑)가 돼 관서 관동 영호남을 떠돌았다. 세인은 그를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렀다.

저자는 유학 불교 노장사상까지 깨친 큰 사상가였다. 매월당 사후인 1582년(선조 15) 율곡은 왕명을 받들어 ‘김시습전’을 지었다. 그때 “행적은 불승으로 살았으나 마음은 유학자였다”랬다. 저자를 다 담아낸 표현은 아니다. 매월당은 미치광이 행세하면서 자신을 감추고, 방랑 수행을 하면서 민심과 어깨동무했다. 그러다가 환속해 속세로 뛰어들었으니 글자 그대로 자유인이었다. 고뇌만 하는 무력한 지식인이 아니라 실천가였다. 매월당은 서울로 돌아와 나랏일과 정치에 참여해 보려 애썼지만 뜻을 못 이뤘다. 아무도 그를 천거하지 않았기 때문. 매월당이 버거워서 그랬을까.

좌절 비분강개 문제의식이 소용돌이쳤다. 그런 산고 끝에 금오신화라는 걸작이 나왔다. 신화(新話)가 이제 신화(神話)로 빛난다. 그러하기에 “금오신화는 중국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아류”(이산해 ‘매월당집서’)라는 견해는 흔들린다. 문학과 권력·사회가 맺는 관계가 낳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권력이 인재를 등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레 절감한다. 만사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며 등 보이며 멀어져가는 매월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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