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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9>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기막힌 삶의 혁명가, 힘들 때 그를 기린 작품 쓴 나림…모두 거인이었다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11-20 20:00:04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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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인·초인이자 타고난 예술가
- 레닌 친구면서 테러로 항일투쟁
- 작품 속엔 ‘동정람’ 경외심 가득
- 자기 소설 중 자부심도 가장 커

- 나림 출감 뒤 공덕 달동네 생활
- 옥바라지한 여인도 함께 지내
- 그 시절 기억을 이 작품에 녹여

나림 이병주는 만사(輓詞)를 여러 번 썼다. 지리산에서 스러진 친구들을 위해서도 썼고,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정국을 살아낸 청춘들을 위해서도 썼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도 10년 미리 만사를 썼다.
경남 밀양시 내일동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조선의용대 사진이 자랑스럽게 내걸려 있다. 아나키스트이자 독립투사 ‘밀양 사람 김원봉’이 창설했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의 주인공 동정람 또한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어느 만사인들 사연이 없을까마는 ‘그 테러리스트’ 동정람을 위한 만사는 특히 사연이 깊다. 동정람은 아나키스트 독립투사다. “정말 특이한 재질과 희귀한 품격을 가졌으면서도 그 보람을 꽃피우지 못하고 누항에 묻혀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고요할 정(靜)에 샛바람 람(嵐)이란 이름부터가 모순적 일생과 잘 어울린다. 동(東)이란 성은 하얼빈에서 거둬 키워준 러시아 정교회 신부가 골라준 것으로, 그의 뿌리 없는 삶을 상징한다. 동녘 동은 한국에선 전무후무한 성씨다.

■ “자부심 느끼는 소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1983년 작품이다. 나림은 “그때까지 썼던 소설 중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소설”이라고 하며, 실재 인물을 1.5배 확대하고 약간의 픽션을 더했을 뿐이라고 부연했다. 굳이 부풀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기막힌 인물의 이야기다. 나림의 품인(品人) 또한 따듯하고 진지하다. 나림의 글은 박력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마초같이 거칠면서도 온화한 느낌을 주는데 이 작품은 유난히 더 그렇다. 동정람에 대한 경모와 애틋함이 짙다.

만사는 기리려는 사람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것이다. 생각과 활동 그리고 품성과 인간관계 등을 두루 망라한다. 사람을 설명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모두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이다. 하지만 만사를 쓰려면 그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동정람은 우선 “욕심이 전연 없는 사람”이고, “미소가 그냥 잔주름으로 새겨진 듯한 부드러운 인상”의 일흔 노인이다. 순진하면서도 세상일을 다 알고 있는 자유인이자 초인(超人)이다. 퉁소의 명수로 천재적 예술가이다. 피엘 랑팔의 플루트 소리보다 훨씬 우월한 피리 소리를 낸다. 랑팔의 플루트 소리가 천재의 소리라면 정람의 피리 소리는 신의 소리라고 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그리고 신화와 동물학에 정통한 박람강기의 지성인이기도 하다.

다음, 그는 당시 생존해 있는 사람 중 레닌을 친구로 만났던 유일한 사람이다. 처음엔 이동휘의 통역으로 만났고 여운형과의 만남에도 동석했지만 그 후로는 친구로서 여러 차례 만나 사상과 인간의 문제를 논한 바 있다. 동정람은 공산주의를 부정하면서도 그 우두머리인 레닌에 대해선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다. 그는 “레닌으로부터 얻은 최대의 교훈은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레닌 같은 인물도 감당하지 못하는 공산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고 레닌에게 직접 말했다고 한다. 동정람의 총명함과 정직함이 빛난다.

끝으로,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하며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테러리스트다. “테러는 인류의 새벽에 명성(明星)을 주기 위한 것”이란 신념으로 아나키스트 조직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늘 선두에 나섰다. 언어도(言語道)가 단(斷)하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하면 집검을 하건 집총을 하건 나서 싸워야 하는 법. 그런 인물이 바로 테러리스트다. 온전한 테러는 산 사람을 죽이는 살생이 아니라 정신이 죽은 자 또는 이미 죽었어야 하는 자를 죽이는 살사(殺死)라는 논리로 테러를 완수하고 나면 정람은 돌아와 피리를 불고 책을 읽는다.
아나키스트이자 독립투사였던 백정기 유자명 이회영(왼쪽부터). 소설 속 동정람은 이들을 연상하게 한다. 국제신문DB
■ 세 번째 거사 멈춘 이유

동정람이 롤 모델로 여기는 인물이 러시아의 테러리스트 사빈코프 필명 로푸신이다. 로푸신의 ‘창백한 말’은 혁명적 정열이 넘치는 한 인간의 체험을 1000도 2000도로 끓여 증류해 놓은 것과 같은 박진감 있는 기록으로, 나림의 여러 작품에 소개되고 있다. ‘산하’에는 로푸심이란 신비한 인물을 통해, ‘허상과 장미’에선 최성애가 프랑스어판을 번역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번역을 끝낸 최성애는 “뭐든 아름다울 수 있다. 테러라는 공포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며 전율한다. 테러의 미학 즉 최소한의 피해를 야기하며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것이다.

동정람은 “테러리스트에겐 소명의식이 있다”고 하고, 동지 하경산은 공자의 ‘기서호(其恕乎)’를 인용하며 용서와 테러를 말한다. 용서와 테러를 결부시키면 개인 감정으로 테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정의를 위한 테러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크로포트킨의 용어로 하자면 바로 ‘고귀한 동기(Noble Motive)’다. 그 책의 “한때 여왕처럼 군림하던 여자가 이제 창녀처럼 사랑을 구걸하고 있다”는 구절은 나림이 여러 소설에서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다.

동정람은 관동군 특무기관에서 밀정 노릇하며 동포를 수도 없이 해하던 자들이 해방 후에 교묘하게 신분을 위장하여 득세하는 것에 테러를 가한다. 정계와 재계의 거물이 되어 있는 둘은 사고처럼 꾸며 처치하는데, 세 번째 테러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악랄하기로는 셋 중 으뜸이고 친구 경산의 부인을 모욕하여 자진케 한 원수 중의 원수인데, 사고무친이 된 소녀를 딸처럼 양육하고 있는 모습에 동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결국 경산의 해량(海諒)과 기지로 해피 엔딩을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의 여러 삽화들이 흥미롭다.

■ 인생도 꽃이건만

인생도 꽃이다. 사람은 저마다 꽃으로 피고 꽃으로 진다. 살다 보면 고목에 꽃이 피는 기적도 있다. 동정람의 음악적 천재를 흠모하는 작곡가 처자의 출현으로 허름한 공덕동 골목에 핑크빛 로맨스가 아련하다. 목로주점 중년 여주인과의 삼각관계도 애틋하다. 정람에게 잠시 회춘의 기쁨이 있었다. 화자(話者)인 작가와 친구 경산은 “늙은 말이 콩을 마다하랴”며 유쾌하게 놀리지만 인생이란 역시 불가사의하다. 혹시나 뿌리를 내리나 하는 순간 비극이 발생하고 정람은 다시 떠돌게 된다. 십수 년이 흘러 그의 부음을 들은 작가는 젊은 처자가 2년에 걸쳐 정람을 찾아선 임종까지 모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한 번의 반전이다. 독자로선 그 대목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된다.

나림은 과연 진혼(鎭魂)의 보람이 있었는지 아득한 기분이 든다며 만사를 마무리한다. 겸손과 자부심이 혼합된 표현이다. 독자 입장에선 ‘마술사’와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이은 또 하나의 엑조틱(exotic)하며 유니크(unique)한 스토리를 만난 감동이다. 나림은 출감 후 옥바라지를 했던 여인과 두어 달 공덕동 달동네에서 지낸 적이 있다. 정보부 차장을 하던 제종형 이병두의 주선으로 그 집을 나오게 되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장편 ‘낙엽’과 중편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로 표현했다. 두 작품 모두에서 정신적 지주인 노혁명가를 깍듯이 모신다.

■ 거인은 떠나고 시대는…

나림에게 짧은 공덕동 시절은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외롭고 아픈 노 지사들을 각별하게 챙겨드린 것이다. 때가 아닐 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진정 대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그렇게 멋진 소설로 엮은 것이다. 공덕동의 여인은 나림의 책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 많고 호학하는 나림이 혹시 책 때문에 돌아올까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 테러리스트 동정람과 지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학처럼 살았던 집우(執友) 하경산 그리고 그들을 정성껏 모시고 만사까지 쓴 이병주 모두 우리 시대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거인이자 대인이다. 진정한 자유인들이었다. 세상은 더욱 각박해졌고 사람들은 더더욱 좀스러워진 대목에서 멋스럽고 어른스러운 그분들이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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