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6> ‘행복어사전’

1970년대 암울한 세태 꼬집기…사회 ‘교정’하고픈 소망 담아

  • 정미진 경상국립대학교 강사
  •  |   입력 : 2022-10-30 19:12:25
  •  |   본지 14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1976~1982년 문학사상 연재
- 주인공 신문사 교정부원 설정
- 모순·부조리 판치는 일상 그려

- 인간 정감 소설로 기록해 눈길
- 행복 꿈꾸는 평범한 시민 위로
- 독특한 관점의 로맨스 표현도

행복어를 망라한 사전이 있다면, 그 사전 속에는 과연 어떤 말들이 기록될 수 있을까?
MBC가 이병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1991년 만든 드라마 ‘행복어사전’ 한 장면. 최수종(가운데) 배우가 주인공 서재필 역을 맡았다.
1976년부터 1982년까지 73회에 걸쳐 ‘문학사상’에 연재된 ‘행복어사전’은 ‘서재필’이라는 작중 인물을 중심으로 당대 한국의 세태를 폭넓게 그려낸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작가 이병주의 현실 인식, 소설론과 종교관, 사랑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병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 사상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설가 이병주의 인식을 총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행복어사전’이다.

■‘사막’과도 같은, 1970년대

한국 최고의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신문사 입사 시험에서 “오백여 명 가운데서 제1번으로 뽑”힌 서재필이 근무하는 부서는 다름 아닌 교정부이다. 이미 작성되어 인쇄를 앞둔 기사들 사이에서 오탈자를 잡아내고 문장을 바로 잡는 곳. 그렇다면 왜 신문사의 핵심 부서인 사회부나 정치부가 아니라 교정부인 것일까?

서재필의 주변 인물을 통해서도 1970년대 시대 상황과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지만, 서재필을 교정부원으로 설정함으로써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혼’이나 ‘한국 여자가 일본 여자를 살해한 사건’ 따위 가십부터 ‘무장간첩 체포’ 같은 굵직한 사건뿐만 아니라 “공산군이 점령한 후의 캄보디아 사태” “다섯 명의 일본 적군파 청년들이 쿠알라룸푸르의 미국 영사관을 점령한 일” 등 국제 정세까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이는 동시대 사건과 사고를 다룬 기사가 한자리에 모여드는 곳이 교정부이기에 가능한 것이며, 이를 통해 독자는 1970년대를 더 폭넓게 살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서재필이 교정하는 기사를 통해 1970년대를 바라보는 이병주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절도나 간통 같은 사건이 연일 신문 지면을 가득 메우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먹고, 뜯는’ 시대. 빚에 시달리던 일가족이 집단자살을 계획하는 동안 어느 재벌의 아들은 유흥비로 억대 가까운 돈을 쓰는가 하면, 20대 유행 가수와 놀아난 50대 기업체 사장의 부인도 있다.

‘이 사회가 썩어가는 과정을 증명’하듯 ‘행복어사전’ 속 1970년대 한국은 모순과 부조리가 판치는, 그야말로 ‘부패가 유행처럼 되어 있는 사회’이기에 ‘어딜 가나 사막, 사막’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 교정부에 서재필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암울한 사회를 ‘교정’하고 싶은 이병주의 소망이 얼마쯤 반영된 것은 아닐까.

■ ‘로맨스’가 말하는 것

2000년대 초 신문사 편집국 모습. 소설 ‘행복어사전’은 신문사 편집국에서 ‘교정부’ 기자로 일하는 주인공의 눈으로 본 세태를 담았다. 국제신문 DB
또 한 가지 ‘행복어사전’에서 큰 축을 이루는 것은 탁월한 능력과 잘생긴 외모를 갖춘, 그야말로 비범한 주인공 서재필의 로맨스이다. 서사가 전개되는 동안 서재필은 여러 여성 인물과 로맨스를 펼치고, 그 로맨스로 인해 번민한다. 신문사 교정부원 시절에는 같은 신문사 직원인 차성희와 안민숙 사이에서, 이후 결혼을 약속한 정명욱과 박문혜 사이에서 갈등한다.

정명욱과 결혼식을 하는 도중에도 김소영과 차성희 안민숙 박문혜 등과 함께 자신의 아이를 낳은 김소향을 떠올리는가 하면 김소향에게서 받은 아파트에서 만난 양공주 임선희와는 정기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한다.

사실 ‘행복어사전’ 속 서재필의 로맨스는 지나치게 분방하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부분도 더러 있어 현재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요소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한 남성의 여성 편력을 자유롭게 그린 ‘행복어사전’이 널리 읽힐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1970년대 사회 통념이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로맨스를 다루는 이병주의 다른 소설들과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사랑의 가치를 단순한 욕망의 분출이 아니라 한 인간의 처절하리만치 강력한 ‘행복에의 의지’(소설 ‘낙엽’ 중)에서 찾는 사랑에 대한 이병주의 독특한 관점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 어긋난 신념과 인간 비극

‘행복어사전’의 서재필이 신문사 교정부에서 만난 윤두명은 “옥황상제를 믿고 그 믿음을 널리 전파하라”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옥황상제교를 믿고 상제교의 포교에 헌신한다. 윤두명이 옥황상제교에 전력을 다한 것은 종교의 힘으로 당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그런 윤두명의 믿음은 결국 스스로 힘이라고 생각했던 조직과 돈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윤두명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옥황상제교를 지켜보던 서재필은 종교에 대한 비판을 감추지 않는다. 서재필이 생각하기에 유럽의 종교재판, 조선의 천주교도 학살과 같은 사건은 종교에 대한 맹신이 불러온 비극이라는 것이다.

이병주는 소설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빈번하게 드러낸다. 이는 개인 삶을 억압하고 강제하려 하는 종교의 습성에서 폭압적 사상이 빚어낸 한국 역사의 비극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이념 갈등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 앞에 시간이 갈수록 심화돼 급기야 전쟁으로 번졌다. 이병주에게 6·25전쟁은 사상에 대한 맹목이 극단적 형태로 발현된 참극이었으며, 이병주는 그 사이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때문에 이병주는 종교든 사상이든 그 자체는 긍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 용인될 수 없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드러낸다.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소설 ‘삐에로와 국화’중)

■ 정감의 기록으로서 소설

서재필이 신문사 교정부원에서 소설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시작하는 소설 중반 이후 소설 또는 소설 쓰기에 대한 이병주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서재필은 사실만 열거해도 거짓이 되는 현실에서 되려 “참말을 참말답게 만들려면 거짓을 필요로 하게 되는 인생의 기미는 소설로써 해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한 맺힌 내 마음을 풀어나가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보자”고 결심한다. “돈 걱정 없는 문학은 하고 싶지 않소. 돈 걱정이 곧 인간의 생활이고, 그런 생활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라야 문학”이라는, 그야말로 생활에 밀접한 소설을 쓰겠다는 서재필의 문학론은 삶을 ‘기록’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역사의 비극과 원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역사에서는 지워져야만 했던 사실을 반추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서재필의 논리이다. 역사의 방식으로는 생활과 그 속의 평범한 인간의 정감(情感)은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병주는 객관적 기록이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의 원한을 기록하기 위해 허구로서의 소설을 선택했고, 소설의 허구는 거짓으로서의 허구가 아닌 ‘진실을 인간적으로 번역’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행복어사전’은 이병주 자신의 소설론에 대한 설명이자 실천이기도 하다.

■ 인간적인 기록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행복어사전’은 ‘행복을 마스터하기 위한 사전’이 필요하고, ‘행복을 기념하고 기원할 만한 탑’이 필요한 1970년대 일상의 기록이다. 행복을 희구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일상의 기록이 ‘행복어사전’의 정체인 것이다.

행복을 꿈꾸던 주인공 서재필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국 땅을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그가 꿈꾸던 ‘행복어사전’은 결국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이병주는 소설 연재를 마무리하며 1970년대 한국 사회라는 소용돌이에서 구출해 떠나보낸 서재필이 아니라 떠날 수 없이 197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일상에서 나름의 ‘행복어사전’을 채워 넣고 있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을.

※공동기획:국제신문·부산문화재단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치킨게임 내몰린 가덕 vs TK 신공항
  2. 2“마린시티·깡통시장…팔색조 부산 새 슬로건에 담아”
  3. 3시민공원 야외주차장 학교 서는데…만성 주차난 어찌할꼬
  4. 4수리조선 쇠퇴에 지역 휘청…젊은 일꾼 다 떠나 맥 끊길 판
  5. 5“10만 시민 인터뷰로 총선 공약 만들 것”
  6. 6[뉴스 분석] 국민연금 2055년 고갈…더 걷는 데는 공감, 더 줄지는 격론
  7. 7아픈손가락 윤성빈, 롯데는 포기 안했다
  8. 8실내 마스크 27개월 만에 ‘의무’ 벗는다
  9. 9“또 나오라”는 檢에 이재명 불응 시사…구속영장 청구 수순?
  10. 10당정 업고 TK공항 급부상…가덕 관문공항 지위 치명타
  1. 1치킨게임 내몰린 가덕 vs TK 신공항
  2. 2“10만 시민 인터뷰로 총선 공약 만들 것”
  3. 3“또 나오라”는 檢에 이재명 불응 시사…구속영장 청구 수순?
  4. 4당정 업고 TK공항 급부상…가덕 관문공항 지위 치명타
  5. 5일 터지고서야 ‘뒷북 간담회’…TK 눈치보는 부산 국힘의원
  6. 6"공공기관 비인기 실업팀 운영을"
  7. 7'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찬반 與 입장 오락가락
  8. 8이재명 12시간 반 만에 검찰 조사 마무리…진술서로 혐의 전면 부인
  9. 9조경태 "전 국민 대상 긴급 난방비 지원 추경 편성하라"
  10. 10대통령실, '김건희 주가조작 의혹' 제기 김의겸 고발 방침
  1. 1수영강 조망·브랜드 프리미엄…센텀권 주거형 오피스텔 각광
  2. 2난방비 충격 시작도 안 했다, 진짜 ‘폭탄’은 다음 달에(종합)
  3. 3'난방비 폭탄'에… 부산지역 방한용품 구매 급증
  4. 4코스피 코스닥 새해들어 11% 상승
  5. 5난방비 폭탄에 방한용품 불티… 요금 절감 방법도 관심(종합)
  6. 6대저 공공주택지구 사업 본궤도… 국토부 지정 고시
  7. 7국토부 “전세사기 가담 의심 공인중개사 용서하지 않겠다”
  8. 8미래에셋 등 서울 기업들 ‘엑스포 기부금’ 낸 까닭은
  9. 9겨울에 유독 힘든 취약계층…난방비 급증하는데 소득은↓
  10. 10아마존 핫템된 ‘떡볶이’…지역 146사 해외 온라인몰 안착
  1. 1“마린시티·깡통시장…팔색조 부산 새 슬로건에 담아”
  2. 2시민공원 야외주차장 학교 서는데…만성 주차난 어찌할꼬
  3. 3수리조선 쇠퇴에 지역 휘청…젊은 일꾼 다 떠나 맥 끊길 판
  4. 4[뉴스 분석] 국민연금 2055년 고갈…더 걷는 데는 공감, 더 줄지는 격론
  5. 5실내 마스크 27개월 만에 ‘의무’ 벗는다
  6. 6아시아드CC “복지기금 그만 줄래” 주민 “일방파기” 반발
  7. 7면세등유·비룟값·인건비 급등 ‘삼중고’…시설하우스 농가도 시름
  8. 8“가스 아끼려 난로 쓰다 전기료 3배” 취약층 생존비용 급증
  9. 9경찰·국정원, 북한 지령 받아 창원서 반정부 활동 ‘간첩단’ 4명 체포
  10. 10HJ重이 곧 영도…작년 말 6500억 일감 확보로 부활 기지개
  1. 1아픈손가락 윤성빈, 롯데는 포기 안했다
  2. 243초 만에 ‘쾅’ 이재성 2경기 연속 벼락골
  3. 3또 신기록…‘빙속여제’ 김민선 폭풍 질주
  4. 4의심받던 SON, 골로 증명한 클래스
  5. 5임성재 PGA 시즌 첫 ‘톱5’
  6. 6"공공기관 비인기 실업팀 운영을"
  7. 7V리그 여자부 현대건설, 흥국생명 양강 체제
  8. 8벤투 감독 ‘전화찬스’…박지수 유럽파 수비수 됐다
  9. 9이적하고 싶은 이강인, 못 보낸다는 마요르카
  10. 10쿠바 WBC 대표팀, 사상 첫 ‘미국 망명선수’ 포함
우리은행
박선정 소장의 달리 인문여행
세상을 다 가졌던 여왕의 도시, 그 자체로 위대한 박물관
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리바이어던-토머스 홉스(1588~1679)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유물들 外
교묘한 디지털 성범죄 대처법 外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그림 세계 /주강식
방패연-낙동강·393 /서태수
이원 기자의 드라마 人 a view [전체보기]
뮤지컬 영화 ‘영웅’ 윤제균 감독
‘커넥트’ 미이케 타카시 감독
이원 기자의 영화 人 a view [전체보기]
‘교섭’의 임순례 감독
‘영웅’의 나문희·김고은
이원 기자의 Ent 프리즘 [전체보기]
작품 홍보 인터뷰도 못 나온다고요? 주연배우의 책임감 아쉽다
아바타2 한국서 세계 최초 개봉…아이맥스? 3D? 뭘로 즐길까
일인칭 문화시점 [전체보기]
“첼로 심준호, 일렉 기타처럼 파격 연주…부산시향과 협연 코로나 탓 미뤄졌죠”
20여 마리 고양이 화려한 몸짓과 완벽한 호흡
조재휘의 시네필 [전체보기]
'유랑의 달'…일본사회 ‘질서의식’ 바라보는 재일동포 감독의 시선
'젠틀맨' 강렬한 장르영화…차세대 감독의 발견
BIFF 리뷰 [전체보기]
‘지석’
뭐 볼까…오늘의 TV- [전체보기]
뭐 볼까…오늘의 TV- 2023년 1월 30일
뭐 볼까…오늘의 TV- 2023년 1월 26일
방호정의 컬쳐 쇼크 & 조크 [전체보기]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한 중국영화 ‘문맨’
RM의 첫 번째 정규앨범 ‘indigo’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3년 1월 30일(음력 1월 9일)
오늘의 운세- 2023년 1월 26일(음력 1월 5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 2022년 10월 13일
오늘의 BIFF - 2022년 10월 12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탐욕 부리지 말고 자족하는 삶 살아야 한다는 김정국
설날 맞아 백성이 잘살기를 기원한 남공철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