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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5> ‘산하’

낱낱이 파헤친 이승만 정권 민낯…韓민족 나아갈 길 모색

  • 정찬영 동서대 교수
  •  |   입력 : 2022-10-16 19:25:55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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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정권 탄생·몰락 다룬 실록소설
- 실존 인물 형상화, 사료 곁들여
- 기록자 소명·역사탐구 역할 수행

- 경제 불평등 해소, 사상의 자유
- 문학으로 올바른 이정표 세우기
- ‘진평분육’ 복지 행하는 정치인
- 깨인 눈으로 살펴보라고 강조

동양의 전통적인 독서법에 이런 말이 있다. 강일독경 유일독사( 剛日讀經 柔日讀史). 강한 날에는 경전을 읽고,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책을 읽는다. 마음이 뒤숭숭한 날에는 경전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한 날에는 역사를 읽으며 의지와 사명감을 찾으라는 말인가 보다. 작가 이병주는 당대를 어떻게 읽고 기록으로서의 소설을 지향했을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국립 3·15 민주묘역의 조형물 ‘정의의 벽’(왼쪽)과 시민의 의로움(義)을 강조한 기념관의 전시물. 나림 이병주 작가의 7권짜리 소설 ‘산하’는 1960년 마산 3·15 부정선거와 4월 민주혁명(4·19)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생생히 담았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기록과 문학, 문학과 기록

일제 치하의 학병 체험과 한국전쟁, 4·19와 5·16 등 지난한 한국현대사를 문필가로서 감당해온 이병주에게 문학은 곧 역사 탐구이다. 문학으로 당대 역사를 감당하며 올바른 이정표를 세우고자 한 것이 공적 목표라면, 개인적으로는 스스로가 구원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정신의 마지막 보루이자 긍정의 문화인식일 것이다. 곧, 갇히고 막힌 시대를 열고자 하는 사마천식의 역사인식이 자각과 실천으로 표상되어 시대를 증언하는 일련의 작품들로 드러난 것이다.

이병주에게 문학은 먼저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한 물음이고, 다음으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창작방법의 문제였다. 이병주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란 말로 압축되는 기록자로서의 문학관을 갖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실록소설은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 소설을 의미한다.

단편소설 ‘제사막(第四幕)’에서는 “시사성(時事性)과 보고성(報告性) 그리고 객관성(客觀性)으로서 이루어진 몇 개의 에피소드가 엮어내는 소설을 통해 소설의 영역을 좀 더 넓혀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병주의 소설은 사실과 허구의 복합 양식이고 ‘산하’ 역시 이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 갈마드는 현실과 허구

‘산하’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60년 4월 19일 전까지 해방정국의 정치적 혼란상으로 시작하여 이승만 정권의 탄생과 몰락을 다룬 정치소설이자 정치 이면의 여러 층위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증언소설이다. 해방 후 격변기의 미군정 치하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노름꾼 이종문이 상경하여 마약과 토목 물류 등 사업으로 성공하고 배신과 모략의 와중에서 제1 공화국 국회의원까지 되었다가 몰락한 과정을 그린다.

알려졌듯이 경남 김해가 고향인 이종문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입고 건설업계를 좌지우지하며 자유당 창원 국회의원을 지낸 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고, 실존 인물을 그대로 등장시켜 당시 정치를 생생하게 서술하는 바 이승만을 비롯하여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장택상 이기붕 신승모 조봉암 조병옥 김두한 이범석 등등 수많은 실존 인물이 나온다.

또한 기록자의 소명과 신빙성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각종 사료와 논평을 곁들여 엮는 형식을 취한다. ‘산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트루먼 스탈린 등 세계 지도자의 심리 상황과 판단을 제시하여 조선 해방과 이후 상황이 세계사적 질서의 재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종문의 상경기는 수많은 정당의 출현과 노선투쟁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마치 해방전후사를 보는 듯하다.

■ 이종문의 상경(上京)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에 1962년 세운 3·15 의거 기념탑. 김성효 기자
이종문은 본시 일자무식 노름꾼이었다. 노름으로 재산을 불린 이종문은 해방이 되자 더 큰 돈을 벌 욕망으로 무작정 상경길에 오른다. 한편으로는 일본 여인과 일본 헌병을 통해 아편을 인수해 돈을 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근환과 같은 독립투사, 이동식과 같은 지식인과 친분을 쌓으면서 나름 국내 정세를 보는 눈을 키워가다 이승만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후 이종문은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꾸준히 보내며 드디어 이승만 권력 가까이 가게 되고 이승만을 ‘아부지’라 부르며 성공한 사업가로 정치인으로 화려한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이종문의 권세는 이기붕이 자유당 실력자로 등장하는 등의 일련의 상황에서 점차 약해지고 궁극에는 이승만 정권 몰락과 함께 쇠락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의 정치공작·매관매직·부정축재·부정선거 등이 여실히 드러남은 물론이다.

■ 다시,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산하’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좌우익의 권력 다툼과 이승만의 권력 쟁취 과정, 한국전쟁과 이후 각종 혼란상 등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제시하면서도 민족 장래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중도적 인물 이동식을 통해 당대를 적극적으로 증언하며 보고서 신문기사 격문 정부발표문 등의 실제 사료를 적절히 배치해 역사성과 사회성을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보도연맹학살사건·거창학살사건·방위군사건·중석불사건·부산개헌파동·부정선거 등 현대사의 어둡고 비극적인 사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소설 말미는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이종문이 5·16 직후 부정 축재와 선거 조작 등으로 2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선거에 낙선하고 사업도 실패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명구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로 대미를 맺는다.

권력(勸力)의 권(權)이 저울추의 다른 이름이고 정의 (justice)가 오른손엔 칼을, 왼손엔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 유스티치아에서 온 말임을 기억한다면 정치와 권력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을 알게 된다.

역사는 흐른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어디인가, 어느 곳으로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 없이 역사를 올바르게 보기는 어렵다. 보편적인 역사학은 역사의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으며 그 방향은 정치적인 속박을 벗어나는 길, 경제적인 불평등을 극복하는 길,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 사상의 자유를 넓혀가는 길이라 일러주고 있다. 이제 다시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방향을 살펴야겠다. 그 분별심으로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하니까 말이다.

■ 산맥과 골짜기, 태양과 월광

이종문 같은 정치인이 아니라 나누어 복된 공동체를 꿈꾸는 진평분육(陳平分肉)을 새기고 실천하려는 정치인이 어드메 있는지 깨어있는 눈으로 살펴볼 일이다. 나림 이병주가 살아낸 삶이란 평탄한 대지가 아니라 비탈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보다. 그 소산이 그의 작품들이고 비탈을 일궈 평지를 만들어가는 것은 독자의 역사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깊숙이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지리산의 앉음새가 그렇고 작가이자 역사가였으며 사상가였던 사람의 깊이가 그렇고 역사의 ‘산맥과 골짜기’가 그러할 것이다.

이병주의 문학적 깊이는 인물들의 마이크로적인 접근을 통해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가늠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속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

큰비 오고 난 뒤의 높푸른 ‘산하’를 목도하기 위해 우리는 마땅히 한국 현대사의 골짜기를 메워간 이병주의 길에 동행해야 한다. 없는 길도 가면 길이 되고 있는 길도 묵혀 두면 세월이 지워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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