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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상 속 인간의 선의

개막작 ‘바람의 향기’ 리뷰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2-10-05 19:41:10
  •  |   본지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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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 ‘바람의 향기’(2022)는 정적이지만 강렬한 풍경의 이미지로 도입부를 연다.
BIFF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 컷.
다리가 불편한 한 남자가 위태롭게 경사진 벼랑을 기어가 돌을 두들기며 무언가를 캐내는 모습을 망원렌즈 카메라의 롱숏으로 오래도록 응시하는 롱테이크 신은 그 자체로 완성된 그림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단번에 함축한다. 척박한 풍토임에도 장소에 굳건히 뿌리박은 나무는 하반신 장애인 남자와 동일시를 이룬다. 이건 황폐한 세상에 발을 딛고서도 꿋꿋이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루고자 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란 영화에는 소시민 영화의 전통이 있다. 종교와 정치의 현실을 다루는 걸 금기시하는 검열 제도의 강력한 구속과 제약 속에서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같은 이란의 영화인들은 현실을 증언하는 모종의 돌파구로서 차일드 시네마를 포괄한 소시민 영화의 문법을 발전시켜왔다. ‘바람의 향기’ 역시 이러한 이란 소시민 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한 나머지 자살 시도를 거듭하는 노인의 고립감을 다루었던 ‘아야즈의 통곡’(2015)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한 바 있던 하디 모하게흐 감독은 ‘바람의 향기’에서 공동체적 삶의 정감과 인간의 선의에 방점을 찍는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출하다. 이란의 어느 시골 마을에 하반신 장애의 한 남자가 전신 마비를 앓는 아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그러다 기계 고장으로 전기가 끊기자 곤란해진 그는 불편한 몸을 끌고 간신히 휴대전화를 빌려 전력국에 연락한다. 연락을 받고 고장난 시설을 고치기 위해 출장을 나온 전력국 직원은 때론 길을 헤매고, 수리에 필요한 부품이 있는 곳을 찾아 사방팔방을 분주히 돌아다닌다.

영화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의 동요와 흥분을 자제한 채, 카메라는 강의 물결처럼 도도히 흘러가며 직원이 마주치는 사람들 삶의 모습과 풍광을 파노라마처럼 훑어나간다.

이 영화는 마치 키아로스타미의 세계에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를 들이대어 찍은 영화 같다. 인물과 풍경을 한데 아우르는 넓은 화각에 정갈한 구도의 숏, 가능한 컷을 쪼개지 않고 차분한 호흡의 롱테이크를 구사하는 영화는 엄격한 형식미학의 아름다움 속에 이란의 척박한 현실을 담는다.

영화 속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는 사뭇 양가적이다. 지표면에 석유 가스가 분출되어 불타오르는 산유국임에도 변방 사람들은 사회 인프라와 복지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이란의 낙후된 사회상에 대해선 은연 중 비판의 날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하반신 장애의 남자가 바늘귀를 꿰려는 노인을 돕고 전력국 직원이 여정 도중 만난 장님의 데이트를 돕는 것처럼, 저마다 장애를 안고 천형(天刑)과 같이 모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끝끝내 서로를 돌보는 선의의 세계를 일구어가는 광경을 비춘다.

그리고 이것이 잔잔하고 고요한 영화의 수면에 강력한 위력의 감동을 만들어낸다. ‘바람의 향기’가 가진 힘은 단지 사회 현실의 일각을 비추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절망의 심연에서도 선할 수 있으며 그러한 선의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가진 세상에서도 선에 대한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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