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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작가, 엄마는 연출가, 딸은 배우로…일본 차별 맞선 교포 3代

연극 ‘치마저고리’ 부산 초연, 뜻깊은 이유

  •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   입력 : 2022-08-31 19:09:34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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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분 1인극 … 작지만 큰 공연

- 80년대 칼질 테러 다룬 작품
- 재일동포 여학생 역할 강하나
- 호소력 짙은 연기 관객 압도

# 대대로 이은 문화예술 뿌리

- 엄마 김민수 극단 달오름 대표
- 직접 겪은 이야기 극본·연출
- 제주4·3 다룬 ‘바람 목소리’
- 외할머니 김창생의 장편소설

# 부산, 한일 교류 장이 되다

- 시민연대 봄 동포돕기사업 일환
- 예술문화 매개 연대 활동 활발

그 공연은 1인극이었다. 작은 작품이었다. 지난 26, 27일 부산 중구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극단 달오름의 ‘치마저고리’ 공연이 열렸다. 27일 토요일 공연을 관람했다. 여러 면에서 이 작은 공연은 아주 ‘큰’ 공연이었다.

지난 27일 부산 중구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열린 1인극 ‘치마저고리’ 공연에서 강하나 배우가 열연하고 있다. 김지운 다큐멘터리 감독 제공
교복을 입은 배우 강하나가 춤추며 나왔다. 60분짜리 1인극 ‘치마저고리’의 시작이었다. 강하나는 대단했다. 한국말과 일본말을 능란하게 부려쓰며 웃고 울고 이야기하고 분노하고 호소했다. 만화를 보며 깔깔대는 요즘 재일동포 여고생이었다가 순식간에 1980년대 말로 돌아가 ‘재일동포 여학생 치마저고리 칼질’ 테러 사건들의 한복판에 섰다. 관객은 압도되고 몰입했다.

‘치마저고리’의 배경을 살펴보자. 1945년 군국주의 일본 정권의 패망과 한민족 해방이 왔을 때, 일본에 살던 수십 만 조선인은 고국으로 못 돌아오고 거기 눌러앉아 살며 재일동포 사회를 형성한다. 1948년 제주 4·3 사건이 터져 수많은 제주도 사람이 일본으로 살길을 찾아 가는 등 여러 변동이 더해진다. 상당수 재일동포는 조국 분단을 인정할 수 없어 남한 국적도 북한 국적도 택하지 않고 더더구나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분단되기 전 나라 이름인 조선의 국적, 다시 말해 ‘조선적’으로 남아 온갖 어려움을 이기며 한민족 정체성을 지킨다.

이 동포들은 1940년대 후반부터 우리말 교실을 많이 세운다. 이것이 현재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의 뿌리다. 한창때보다 꽤 줄었지만 여전히 조선학교는 60여 곳 있고, 여기 다니는 동포 학생의 60% 정도는 한국 국적이다(2019년 기준). 조선학교는 일본 극우·우익의 표적이 됐고 차별에 노출됐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일부 일본인이 자행한 일련의 조선학교 여학생의 치마저고리 칼질 테러 사건은 그중 하나다. 지금도 이어지는 일본 정부의 조선학교 무상교육 배제도 그 사례다. 이제, 왜 ‘치마저고리’라는 작은 연극이 뜻깊고 ‘큰’ 공연인지 알아보자.

■ 배우 강하나

1인극 ‘치마저고리’ 한 장면.
배우 강하나는 재일동포 4세다. 그는 조선학교를 다녔다. 2000년생인 강하나는 2016년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그린 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 출연을 계기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다. 공연 뒤 관객과 대화 자라에 나온 강하나는 단단하고 진지한 인상이었다.그는 일본에서 현재진행형인, 일본 정부의 조선학교 무상교육 배제를 직접 겪은 세대다. “2017년 제가 고2 때 오사카지방재판소 재판에서 딱 한 번 승소했습니다.” 여기서 승소란 조선학교를 무상교육에서 배제한 것이 부당한 차별이라며 많은 조선학교 학생들이 직접 원고가 돼 일본 법원에 제기한 재판에서 이긴 것을 가리킨다. 이를 빼면 관련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 “그때 저도 현장에 있었는데 모두 얼싸안고 울었죠. ‘아! 이제야 인정받는구나’ 하면서요.”

그때 강하나는 선고 직후 관련 토론회에 나가야 했다. “그 재판에서 질 것으로 예상하고 토론문을 준비해뒀거든요. 그 예상이 뒤집혔으니 토론문을 급히 새로 써야 했어요. 좋아서 막 웃으며 토론문을 고쳐 쓴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연극은 강하나의 엄마 세대가 청소년이던 1980년대 말 벌어진 일련의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을 담은 오사카의 재일동포 극단 달오름의 작품이다. 강하나는 3년 전 고3 때 이 작품을 1인극으로 일본에서 일본어로 공연했다.

■ 연출 김민수

공연 뒤 김창생(오른쪽 선 이) 작가가 김민수(왼쪽) 강하나 씨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부산 공연(첫 한국 공연이다)도 일본어로 한다고 홍보가 나갔다. 막상 가보니 강하나는 유창한 한국어를 중심으로 1인극을 끌고 갔다. “부산 공연 며칠 전 ‘이 공연은 한국어로 해야겠다’고 방침을 바꿨어요.“(연출 김민수) “사나흘 정말 열심히 연습했죠.“(강하나)

‘치마저고리’ 극본·연출을 맡은 김민수 극단 달오름 대표는 배우 강하나의 엄마다. 그는 재일동포 3세다. 김민수도 조선학교를 다녔다. 달오름은 2005년 재일동포 3세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그간 작품 20여 편을 만들었으니 그 열정과 부지런함이 느껴진다. 김민수 연출가는 “극단 달오름의 바탕에 마당극이 있다. 우리 주변에 우리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하는 집단이 없어 ‘우리가 하자’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재일청년과 재일조선인이 ‘어두운 밤길을 갈 수 있게 돕는 달빛이 되자’는 것이 우리 지향이다”고 말했다.

달오름이 만든 작품은 1948년 재일동포들이 조선학교 폐쇄령에 맞서 싸운 이야기를 담은 ‘4·24의 바람’, 제주 4·3의 아픔을 그린 ‘고도의 여명’을 비롯해 ‘우토로’ 등이 있다. ‘치마저고리’는 1988년이 배경이다. 김민수 연출가는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을 직접 겪은 세대다. “도쿄에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이 자꾸 벌어지니 조선학교 남학생들이 ‘우리가 보호해줄게’ 하고 나섰죠. 그런데 좀 지나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의 도움은 이제 됐다. 우리가 알아서 한다’고 선언하고는 10명 정도가 함께 치마저고리를 입고 씩씩하게 목적지까지 걸어다녔다고 합니다.” 치마저고리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자존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연극 ‘치마저고리’는 김민수 연출가가 겪은 실화이기도 하다.

■ 작가 김창생

객석에 귀한 손님이 있었다. 김창생 작가였다. 그는 재일동포 2세다. 김창생은 김민수 연출가의 엄마이고 강하나 배우의 외할머니다. 김 작가 자신도 조선학교에 편입해 한민족 언어와 역사를 배웠다. 1951년 일본 최대 한민족 밀집지역인 오사카의 이카이노(지금 명칭은 이쿠노구)에서 태어난 김창생은 정체성·고향·민족을 고민하다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나의 이카이노’ ‘붉은 열매-김창생 작품집’ ‘제주의 흙이 된다는 것’ 등의 책을 썼다. 그가 올해 낸 장편소설 ‘바람 목소리’는 재일동포의 삶과 제주 4·3 속에 핀 사랑과 보살핌 이야기를 그린 수작이다.

2010년 뿌리를 찾아 제주도로 온 그는 최근 경남 양산시에 정착했다.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마이크가 넘어오자 그는 관객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김민수 강하나 씨에게 말했다. “우리 중요한 가치를 잊지 맙시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일 저녁은 우리 집에 와서 먹자.”

■ 그리고 부산

이 연극을 통해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이 생각보다 심하고 컸음을 느낀 점, 재일동포 여성 3대가 예술로 차별에 반대하고 정체성을 다지는 모습을 본 것은 뜻깊었다. ‘치마저고리’ 한국 첫 공연이 부산에서 열린 점도 뜻깊다.

이 공연은 부산의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이 최근 활발하게 펼치는 사업의 일환이다. 봄은 최근 강연·출판·공연기획·영화 상영 등을 잇달아 열며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공감하는 일본인들과 연대하는 활동이 활발하다. ‘치마저고리’도 부산을 시작으로 제주도·서울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여기서 부산이 예술을 매개로 한 연대 활동의 새 거점이 될 가능성을 본다.

최근 광주 고려인마을이 광주를 세계적인 평화도시로 각인하고 있다. 부산에서도 예술문화를 매개로 차별 반대와 국제 연대의 바람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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