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 부친에 한학 등 배웠지만
- 공부보다 권투 등 격투기 즐겨
- 유랑극단서 노래 솜씨 인정받고
- 홀로 면벽 수련해서 실력 쌓아
- 1966년 음반 내자마자 빅히트
- ‘돌아온 남포동’ 등 부산 멋 담겨
부산은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르던 곳, 외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거치게 되는 통과의 장소라는 공간적인 특수성도 있다. 항구의 정서와 뛰어난 미감에 심취해 잠시 술이나 한잔하고 가려던 것이 아예 평생을 머물게 되는 그런 터전이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밀려든 피란민 행렬 속에 부산은 더욱 혼합적 성격의 도시로 변모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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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가요무대에 출연한 박일남. 왼쪽 사진은 1963년 히트곡 ‘갈대의 순정’ 발표 직후 모습. |
대중음악인만 하더라도 부산 출신 토박이는 몇 되지 않았고, 모두 외지인이 와서 정착한 사례가 많다. 가수 강남주, 작사가 야인초, 가수 진송남, 작곡가 남국인 등은 부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들의 출생지는 다른 곳이다. 부산에 와서 잠시 머물다가 아주 눌러 살게 된 경우들이다. 부산의 여러 분야에서 이런 사람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수 박일남만 해도 그렇다.
박일남(1939~ )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인1941년 자녀를 데리고 따뜻한 남쪽을 찾아 부산으로 이주했다. 서구 동대신동이 새로 찾은 터전이었다.
부친은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고, 가정 형편은 안정된 편이었다. 유소년시절에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붓으로 글씨와 사군자를 치는 필법까지 익혔다. 부산에 살던 시절에 박일남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전쟁까지 겪었다. 부산에서 초등과 중학을 졸업하고 해동고를 다녔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몸 속에서 어떤 끼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노래와 공연으로 엮어진 악극단 공연을 본 뒤로부터 생긴 변화였다.
박일남은 고교 재학시절 우남공원(지금의 용두산공원)을 자주 올랐다. 산정에는 일본군이 설치한 고사포가 있었는데 거기 기대어 항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산항을 드나드는 무수한 외항선을 바라보고 수시로 들려오는 뱃고동소리를 들으며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학교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해서 권투 유도 레슬링을 수련하는 체육관을 즐겨 다녔다. 송도와 오륙도 광안리 해운대, 멀리는 기장과 송정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던 추억은 가수 박일남으로 하여금 자신이 부산사람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했다.
당시에는 부산을 지역별로 나누어 그곳을 총괄하는 ‘주먹’이 많았는데 박일남도 어느 한 지역의 멤버로 활동하며 숱한 격전을 벌인 듯하다. 치고 받는 육박전 속에서 박일남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뚝심, 강단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는 지금도 당시 흔적이 상처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모습이 늘 염려스러웠다. 차분하고 정돈된 사내로 성장해 주기를 그토록 갈망하고 타일렀다.
이런 숨가쁜 격정의 시간 속에서 박일남은 어느 날 부산에 들어왔던 유랑극단을 따라 가출했고, 그들과 합류해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런 방랑의 생활이 무작정 좋았기 때문이다. 박일남의 노래 솜씨를 알아본 단장의 적극적 권유와 수용 덕분임은 물론이다.
당시 대표적인 유랑극단으로 ‘쓰리에이쑈단’ ‘오스카극단’ ‘라이온스’ 등이 있었다. 지방의 극단은 ‘중앙쑈’ ‘낭랑악극단’ ‘부산악극단’ 등이 있었는데 박일남은 주로 대형극단에 출연했었다. ‘낭랑악극단’은 가수 혜은이의 부친 정근수씨가 운영하던 소규모였다. 유랑극단 단원으로 전국을 다닐 때 겪은 에피소드들만 엮어도 책으로 몇 권 분량이 될 것이다.
박일남에게 음악지도를 특별히 해준 은사는 따로 없었고, 작곡가 박춘석이 이따금 창법 지도를 해주었다. 선배 가수 안다성은 노래를 부를 때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 마이크 사용 비결을 알려주어서 지금도 그 방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대체로 혼자 벽을 향해 돌아앉아 종일 수련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 때문에 옆집에서 자주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바쁜 세월 속에서도 박일남은 서울 동국대에 진학했다.
1963년은 박일남의 운명이 크게 열린 해이다. ‘갈대의 순정’이라는 빅 히트 곡을 만났다. 오민우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원래 가수 정원을 위해 만들었지만 결국 박일남에게 찾아왔다. 오민우는 박일남의 저음이 주는 매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새로 편곡을 했다. 영혼이 젖어드는 듯한 저음, 간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고음부에서의 애잔한 호소력은 남성 팬보다도 여성 팬을 혼절시키게 했다는 평이 있다.
갈대라는 식물의 상징성은 원래 쉽게 변하는 여자의 마음을 다룬 것이지만, 이 노래에서 갈대는 사랑 앞에 흐르는 사나이의 눈물을 다루었다. 지금도 이 노래에 대한 가요 팬들의 반응은 여전히 뜨겁다. 이 노래가 1966년 킹레코드사에서 발매되고 곧장 히트곡의 반열에 올라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순식간에 30만 장이나 팔렸다고 하니 이런 기록을 깨기는 힘들다.
필자는 2017년 여름 박일남 선생과 대구에서 두 차례 토크 콘서트를 가진 적이 있다. 작은 공연장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밀어닥쳤는지 객석은 만실, 계단에도 빽빽하게 들어찼고, 무대 앞 바닥도 빈틈이 없었다. 관객 반응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박일남의 대표곡은 생각 외로 많지 않다. 계속 뻗어나갈 시기에 느닷없는 대파란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발표 곡 중에서 부산 테마 노래가 더러 있다. ‘고향 설움 타향 설움’ ‘떠나는 마도로스’ ‘마도로스 탱고’ ‘야간열차’ ‘이별의 플레트홈’ ‘고향 가는 길’ ‘내 고향소식’ ‘비에 젖은 목로주점’ 등과 ‘돌아온 남포동’ ‘비 나리는 용두산’(이철수 작사·고봉산 작곡) 정도를 손꼽을 수 있다.
‘돌아온 남포동’에는 박일남의 아련한 첫 사랑의 실루엣이 눈물처럼 서려있다. ‘비 나리는 용두산’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산에 올라 고사포에 기대어 부산항 외항선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소년 박일남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는 듯하다. 언젠가 시간을 길게 잡아서 가수 박일남이 살아온 강물 같은 인생 역정을 모두 낱낱이 듣고 싶다. 술도 한잔 나누면서 박일남 노래도 중간 중간 들어가면서….
남포동 밤거리 추억이 어린다/ 옥이는 어디 가고 이름만 있나/ 내가 자란 항구다만 낯익은 얼굴보다/ 타향에 오듯 그 모두 낯설어/ 세월처럼 더듬는 인심인 걸 알았네(‘돌아온 남포동’ 1절)
비 나리는 용두산 밤은 깊은데/ 그대 없이 나 홀로 누굴 찾아 왔을까/ 사랑이 남기고 간 추억이 애달파서/ 사나이가 처음 우는 비 내리는 용두산(‘비 내리는 용두산’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