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석한 두뇌와 섬세한 음악 감수성을 갖춘 천재에게 운명은 ‘망치’를 모질게 휘둘렀다. 니체는 비틀거렸지만 인간 존엄을 지키고 삶을 사랑하는 찬가를 불렀다. 그는 고통을 지불하고 명저를 얻었다. 자신이 주창한 새 인간 ‘위버멘쉬’가 되고자 몸부림친 흔적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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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니체가 숨지기 1년 전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병간호하고 있다. |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45세 니체는 광장을 걷다 마부가 말을 마구 채찍질하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마부를 말리고 말을 껴안고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이날부터 7일까지 그는 입을 닫고, ‘디오니소스’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서명한 편지를 곳곳에 보내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 결국 니체는 10일 바젤 정신병원에 인도돼 ‘진행성 마비증’ 진단을 받는다. 3일은 니체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 생애 마지막 날일 가능성이 크다. 이후 10여 년 니체는 누이 엘리자베스와 어머니 간호를 받으며 서서히 사위었다.
니체를 든든하게 보살피는 여성이 있었다면 그의 삶이 달라졌을까. 저서에 나타나는 니체 여성관은 비하와 찬사란 양면을 보여 지금까지 논란을 부른다. 현실에서 그는 여심이 가까이하기엔 불편했던, 인기 없는 남자였다. 니체가 32세 때 음악가인 마틸데 트람페다하에게 한 청혼은 불발이었다. 그는 독일 소설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에게도 두 번 구혼장을 내밀었으나 퇴짜 맞았다. 다행히 오랜 벗은 있었다. 하인리히 쾨셀리츠(1854~1918·독일 작가 겸 작곡가)는 니체를 많이 도왔다. 니체는 그에게 피터 가스트라는 가명을 주고, 자신이 병으로 집필을 못 할 때 대필하거나 수정까지 허락할 정도로 막역하게 지냈다.
니체는 사후 정치 희생양이다. 나치즘 파시즘이 니체 사상을 왜곡해 정권 유지 도구로 삼았다. ‘힘에의 의지’를 전쟁과 독재의 도구로 합리화했으니 니체가 꿈꾸던 세상과 정반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