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2월 타계 이어령 선생 유작
- 생존력 강한 한국인 기질 조명
- 청년들의 디지로그 선도 주문

‘디지로그’는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를 이어 붙인 낱말로, 이어령(1934~2022) 선생이 2006년 쓴 책의 제목에서 유래했다. 21세기가 디지털 시대인 건 명백하지만, 디지털 하나에만 매달리면 안 된다고 이어령 선생은 ‘디지로그’라는 책에서 역설했다. 그러면서 ‘디지털+아날로그’ 융합을 중대한 과제로 제기했다. 이런 예측도 했다. “분명 한국인은 디지로그 시대를 앞장서 갈 것입니다.” 2022년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의 ‘디지로그 예측’은 모조리 실현됐다.

2018년 5월 23일 이어령 선생이 부산 해운대구 영산대 해운대캠퍼스에서 열린 ‘와이즈유 건학이념 춘계학술대회’에서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국제신문 DB

이어령 선생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세 번째 책인 ‘너 어떻게 살래’가 출간됐다. 이 책은 부제를 ‘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로 잡았다. 어딘지 익숙하지 않으신가?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공지능을 뜻하니 디지털이다. 인간의 무늬를 그리는 행위는 온기를 지닌 아날로그 세계다. ‘인공지능에 그리는 인간의 무늬’는 디지털+아날로그, 즉 디지로그다. 이어령 선생은 AI 영역에서도 한국인은 아주 잘 해낼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셈이다. 참고로 그의 예언은 실현된 게 정말 많다.

‘너 어떻게 살래’는 2022년 2월 타계한 이어령 선생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파고든 영역이 AI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이어령은 이어령이다. 이어령 선생 특유의 방식과 접근으로 깊은 통찰을 선물해준다. 몇 대목을 인용해본다.

“천지인 융합이 한국을 만든 가장 큰 철학이다. 단군 신화에도 나타나 있지 않나. 땅에 있던 곰, 하늘에서 온 환웅,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인간이니 천지인이다. 하늘과 땅이 결혼하고 융합하고 생명을 낳는 그 과정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가 들어오고 어떤 영향을 입어도 천지인 삼재 사상으로 한국인의 문화유전자가 되어 내려왔다.”(338쪽)

AI 부문에서도 한국은 ‘30분 늦게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 장면이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고 한동안 얼떨떨했다. 그렇다고 비관만 하고 있을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며 그럴 리도 없다. 이어령 선생이 제시해서 수많은 한국인 가슴 속에 콱 박힌 문구가 있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이다. 실제로 이 구호를 실현해 크게 성공을 거둔 한국이 AI라고 못 할 것도 없다는 거다.

“한국 사람이 위기에 강하다는 말은 바로 순발력 때문이다. 기획력보다는 순발력이 좋고 경쟁력보다는 생존력이 강하다. 소나무와 펭귄은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는 추운 극지에서 벼랑과 바위틈에서 자기 생존력을 확보한다. 그게 한국이 살아온 방식이다.” “그런 한국인들이 지금 AI에 열렬한 관심을 갖는 건 어째서일까.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능을 초월하는, 2045년 전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안 게다. 지금, 혹은 앞으로 수년 후의 문제다.”(313쪽)

디지로그는 융합하는 마음이다. 세상 모든 것을 숫자로 전환하는 치밀한 디지털, 생명과 자연에 관한 예민하고 애틋한 감각을 담은 아날로그 감성, 이 둘을 융합하면 거기서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게 디지로그 세계다. 저자는 그런 일에 알맞은 한국인의 심성에 주목한다.

“하고 많은 말 가운데 왜 우리만이 별똥별이라고 불렀을까. 별이 똥을 싸는 것.…어느 나라의 말 가운데 아직 나는 유성 운석을 별똥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찾지 못했다.…생명을 가진 것만이 똥을 눈다”(266쪽) “초기의 시계는 하루에 한 번 태엽을 감아주어야 했다. 우리는 그 태엽을 감아주라고 하는 것을 ‘시계 밥 주라’고 하고 시계가 멈추면 ‘시계가 죽었다’고도 한다. 괘종시계는 완전히 의인화되어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이 취급된다. 시계추를 ‘시계불알’이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일종의 가축처럼 벽에 매달린 식구처럼 산다.”(275쪽)

‘너 어떻게 살래’는 AI를 깊이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래서 어려운 개념이나 용어, AI의 역사와 관련해 꼭 짚어야 할 사항 등이 곧잘 나온다.

저자는 그렇듯 쉽지 않은 AI의 세계에 관한 여러 사항을 마치 청소년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서술한다. 그렇다고 어려운 AI 용어가 마냥 쉬워지는 건 아니지만 AI와 우리, AI와 나, AI와 한국·한국인이라는 주제를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풀어줄 수 있는 저자는 절대 흔치 않을 것이다.

시대의 스승, 탁월한 지식인,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던 저자가 한국과 AI에 관한 책을 쓰면서, 오죽하면 ‘너 어떻게 살래’로 제목을 정했을지 생각해본다. AI의 시대는 곧 당신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이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다시 디지로그 기질을 발휘해 이 판을 죽을 판이 아니라 살판으로 바꿔보자고 저자는 제안한다. AI를 보완하고 활용해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지혜’를 창출하자고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