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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6> 허균과 아나키즘

신분혁명 꿈꾼 조선의 천재 허균… 나림 남달랐던 연민과 추앙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6-12 19:18:20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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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조적인 유학에 반기 든 허균
- 서자차별 철폐 이상사회 외쳐

- 나림 작품에 그 일탈·탈속 담고
- 노장사상 자유분방 행적도 좇아

- 홍길동 실제 모델 홍계남에 애정
- 관련 사적지 찾아 기행문까지 써

- 허균 끝내 실현하지 못한 혁명
- 나림은 실패라 부르지 않고 칭송

이병주는 ‘이사마’답게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두텁다. 정도전과 정몽주 같은 정파(正派)뿐 아니라 허균과 장자와 같은 반파(反派) 그리고 홍계남 같은 비주류 인물까지 두루 소설로 엮었다. 특히 반역적 천재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유난하다.

사람은 보통이면 되는데 보통을 넘는, 그래서 고생을 사서 하는 인물들. 저항적이고 반항적인 천재들. 현대에선 ‘지리산’의 박태영이고, 과거에선 ‘허균’의 허균이다. 허균은 조선 유학 세계의 이단이다. 조선은 교육과 지식이 절대였던 시대다. 스콜라가 전부인 시대, 나쁘지 않다. 다만 열린 지식과 교육이 아닌 인습과 레토릭에 매몰됐다는 게 문제다. 그 시절 매뉴얼을 훌쩍 뛰어넘는 천재가 있었다. 그 천재성을 시대에 영합해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탕진한 인사도 있었고, 권력에 아첨해 세도를 만끽한 인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주 드물지만 그 천재를 기존 질서에 저항하거나 뒤집는 데,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데 애써 집중한 대재가 있었다.

■허균은 기행 일삼는 천재

강원도 강릉시 ‘허균·허난설헌기념관’에 전시된 허균 영정. 국제신문DB
허균은 교조적인 유학이 통치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절대 왕정의 구속이 싫어 작정하고 기행을 일삼는 천재다.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관학을 조롱하듯 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대로 “(유학적) 문장이 일세에 독보하였으나” “불(佛)과 노(老)에도 출입한” 천부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삼척부사 시절에는 목에 염주를 걸어 얼치기 유학자를 놀린 일까지 있었다. 허균은 인생이 그저 ‘음식남녀’라는 사실을 아주 솔직하게 실천한다. 성 스캔들이 끊이질 않았고, 미식가 본능도 당당하다. 황해 도사 시절엔 경향의 기생을 관가 별채에 불러 주지육림을 즐긴 끝에 파직된 적도 있다. 허균이 유배 시절 허기짐 속에서 왕년의 기억만으로 쓴 미식 수필 ‘도문대작(屠門大嚼)’은 입맛을 다시게 하는 근사한 작품이다. 음식 칼럼의 클래식이다.

나림은 허균의 자유분방한 행적도 좇고, 그의 일탈과 탈속도 그린다. 허균의 탁발함은 지성이나 도덕성에 있지 않고 그저 기질에 있을 뿐이라는 주장 같다.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꿈꾸며 쓴 홍길동 이야기도 한다. 홍길동의 율도국, 허균이 구상한 이상 사회다. 나림에 의하면 허균은 아직 출사하기 전부터 노장(老莊)에 심취했다. 허균이 훗날 쓴 ‘한정록(閑情錄)’ 17권의 첫 권 ‘은둔’에는 전설적인 도가(道家) 소부와 허유 이야기가 가득하다. 허균은 갈홍의 ‘신선전’도 열독했다. 허균의 첫 소설 ‘남궁선생전’이 신선술을 익히다 막바지에 주저앉은 남궁두의 사연이고, 기상천외하고 무궁무진한 홍길동의 도술도 ‘신선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갈홍은 아나키즘의 대표 사상가 포경언의 무군(無君) 주장을 기록한 ‘포박자’도 썼다.

■‘홍길동전’은 홍계남 장군 모델

이 전시관에 비치된 허균이 쓴 소설 ‘홍길동전’ 목판본.
‘홍길동전’은 홍계남 장군을 모델로 한 듯하다. 홍계남은 나림이 유별나게 연민을 표한 역사 인물이다. 임진왜란 기간 상당한 공적을 세운 맹장이면서도 서자라는 출신 배경 탓에 당대나 후세에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비운의 무장이다. 나림은 ‘이병주 역사기행’에서 홍계남의 사적지를 두 번 찾은 기행문을 썼고, 소설 ‘천명’을 지었다. 충분히 뜻을 펴지 못하고 서른넷에 죽은 삽상한 청년 장군을 기리는 마음이 애틋하다.

서얼의 차별을 없애고 능력대로 인재를 등용하자는 주장은 허균 이전에도 더러 있었다. 태종 대에 시행되기 시작해 성종 대에 제도화된 서얼금고법(庶蘖禁錮法)은 터무니없는 악법이다. 모친의 미천한 출신 탓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며 출사조차 하지 못하는 서자 차별을 해소하려고 조광조와 이율곡 등이 애썼으나 실효가 없었다. 유독 허균이 좌충우돌하며 신분 혁명의 기상을 불태웠다. 역사는 번듯한 산맥을 기록하지만, 문학은 잊히거나 소홀하게 취급되던 골짜기의 사연을 그리는 것이란 나림의 기록문학 철학은 ‘허균’에서 절정을 보인다. 허균의 정열과 허망은 처절한 권력 다툼이란 현실에서는 초라한 실패였을 줄 모르나 그래도 ‘홍길동전’이란 ‘허균 후기’에서는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홍길동은 병조판서도 되고 율도국의 왕도 된다. ‘홍길동전’은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묘사한 무릉도원의 변주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누가 집어 가지 않는다. 신분의 차별이 없고 폭압적인 정부도 없는 이상향이다.

나림은 “허균은 패자(敗者)조차 아니다”며 서투른 혁명의 실패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당대에 좌절했을 뿐 아니라 조선조 내내 신원(伸寃)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실패한 그를 “허무주의에서 꽃필 수 있는 건 오직 예술뿐이다”며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해준다. 허균처럼 난세에 비범함을 숨기지 않고 양껏 드러내며 산 끝은 어떨까. 오만과 자유를 고수하려면 목숨을 대가로 지불할 수밖에 없다.

■혁명 꿈꾸면서도 벼슬길 오른 이유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반역을 도모하고 자유 지상을 외치는 인사가 왜 대관이 되어 체제가 주는 단물을 즐겼을까? 답은 간단하다. 대은(大隱)은 시은(市隱)이기 때문이다. “크게 숨으려면 조정에 숨는다(大隱隱於朝)”가 바로 그 말이다. 허균은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 벼슬을 했다. 워낙 탁발한 천재에다 부친 허엽과 형 허성의 후광도 있고, 광해군의 세자 시절 스승을 한 덕도 있지만 그의 신분 혁명을 후원하는 강변칠우 등 서얼들의 지지에 부응하기 위한 전략적 의도도 있다. 허균을 추앙했던 강변칠우는 조선 선조, 광해군 때 7인의 서자 출신 서생으로,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힘을 한탄해 북한강가에서 죽림칠현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허균을 정신적 지주이자 혁명의 두령으로 모셨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은 무륜정(無倫亭)에 모여 불우를 시주(詩酒)로 풀며 새 세상을 꿈꿨다. 경직되고 위선적인 윤리를 깡그리 무시하자는 뜻에서 무륜이었다. 이들의 불우는 서얼 차별이었고, 연명으로 상소도 했지만 임금은 허용하지 않았다. 박응서는 영의정 박순의 서자이고 심우영은 관찰사 심전의 자제이나 출사의 길은 꽉 막혀 있었다.

중국 아나키스트의 한 계보인 위진 시대 죽림칠현은 허접한 정치 탓에 불우하긴 했으나 출사는 할 수 있었다. 산도와 왕융 그리고 완적이 벼슬을 했다. 애주가 완적의 경우는 맛난 술을 마시기 위해 최고의 술도가가 납품하는 부서인 보병의 교위를 자청했다. 신동으로 소문났던 죽림칠현의 막내 왕융은 정승까지 지내며 평생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렸다. 산도도 이름난 고관이었다. 나름 제각각 출사의 이유가 있지만, 아무튼 은둔의 대명사 죽림칠현이 모두 야인은 아니었다.

끝내 출사를 거절하고 당대의 실력자 종회를 모욕했던 혜강은 마흔에 처형당한다. 종회는 묵은 명문가 태생에 자질도 뛰어나 젊어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사마의의 지우까지 얻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당대 최고 명사였다. 하지만 혜강에는 못 미쳤다. 혜강 죽음의 직접 이유는 종회의 질투이나,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자존감이다. 범용한 임금 밑에서 허접한 관직으로 전전긍긍하느니 목숨으로 자유로운 의지와 독립적인 인격을 바꾼 것이다.

허균도 조정과 재야를 반복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배를 가도 오뚝이처럼 재기한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으로 뜻은 맞지 않지만 당대 최고의 실력자 이이첨과 정치적 거래도 마다치 않는다. 현실적으로 차마 실현하지 못하는 이상은 소설을 써서라도 다듬는다. 하지만 그의 자유 지향과 탁발한 개성은 시대를 이겨내지는 못한다. “진실의 구슬을 가슴에 지니고 그것을 세상에 펴 보이지 못하는 초조함에 교만하고 견개(狷介)했으나” 결국 허망의 정열이었다.

다만 허균의 비범함과 탈속함이 아무리 대단하고 그의 체제 반역적 구상이 아무리 정교해도 끝내 미덥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일까. 재승박덕 탓인가. 아니면 스케일의 한계인가. 그래도 나림이니까 400년의 시간을 격해서라도 허균을 다시 살려낸 것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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