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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5> 나림과 테러리스트

역사보다 신화가 된 테러리스트, 그 의연한 고백의 기록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5-29 18:57:18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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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가 양근환이 만든 단체
- 해방정국 좌익 인사 테러에 집중
- ‘산하’ 주인공 통해 비상수단 옹호
- 로푸심은 러 작가 ‘롭신’의 차용

- ‘지리산’에선 응징의 품격 강조
- 사법살인 등 국가 테러는 비판

테러리스트의 운명은 영웅적 실패자다. 운명에 대한 테러이든 시대에 대한 테러이든 테러리스트의 고백은 결국 미완이다. 나림은 무명의 패배자에게 발언권을 주고, 결과가 아닌 동기와 과정을 달빛에라도 비추어주고자 했다. 역사의 비정함을 보상하는 것이 문학이며, 현실에서 해소되지 못한 딜레마를 기록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믿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사마천 ‘사기’ 핵심은 군권(君權) 협권(俠權)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 양근환(왼쪽) 선생이 민족지도자 김구(가운데) 선생, 아나키스트계열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양근환은 1921년 일본 도쿄에서 친일 단체 국민협회 회장인 민원식을 암살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사마천 ‘사기’의 종지(宗旨)는 군권(君權)과 협권(俠權)이다. 한편으론 절대 권력자의 인간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유성(流星)이나 호접(蝴蝶) 같은 협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군주다움과 협기를 병렬한 사마천의 수예(手藝)가 절묘하다. 사마천은 역사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 여겼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정치이고,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권력이라고 파악했다. ‘사기’는 정치인(Political man) 기록인 것이다. 중심 인물의 기록이 본기(本紀)이고, 그 인물을 둘러싼 집단의 기록이 세가(世家)이며, 정치인 개인 개인의 기록이 열전(列傳)이다. 그 열전에 자객과 유협(遊俠)의 기록이 도도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어떤 죽음은 새 날개만큼 가볍고 어떤 죽음은 태산처럼 무겁다”는 주장이 문사일체(文史一體)로 유려하고도 비장하다.

■테러리스트는 자신도 죽어야 끝장

‘이사마’ 나림도 테러리스트를 위해 만사(輓詞)를 썼다. “화산의 분출구 옆에 앉아 별을 헤고 있는” 감정으로 미완일 수밖에 없는 테러리스트의 고백을 기록한다. ‘산하’에 그런 지사 테러리스트가 등장한다. 좋게 말하면 난세의 걸물이지만 달리 말하면 ‘천하의 잡놈’인 이종문이 해방을 맞아 큰물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다짐으로 경상도 남녘의 시골에서 서울로 와 처음 의탁하는 데가 양근환 집단이다. 양근환은 내선일체에 앞장섰던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단기(單騎)로 도쿄에서 척살한 항일운동가다. 그의 협기와 과단성에 좌우 인사 모두가 두려워했다. 양근환이 해방 정국에서 만든 혁신탐정사는 특히 좌익 인사 테러에 집중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박열과 양근환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양근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 혁신탐정사의 숙소에서 졸개 행동대원 노릇을 시작하는 도박꾼 이종문에게 사람의 도리와 세상의 이치를 살갑게 훈도해주는 선배 둘이 있다. 문창곡과 성철주인데, 특히 문창곡은 성철주와 장기를 두다 “열 번을 물려달라고 해도 열 번을 다 물려주는” 인품이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의 동정람만큼의 품격과 재능은 아니지만, 의기와 인간됨만큼은 아나키스트 지사답다.

문창곡은 김두한이 형님으로 대우하는 1급 테러리스트다. 역량은 기본이고, “3년 징역은 내가 불민하다는 증거는 돼도 애국자란 증거는 못 되오”라는 겸양까지 갖추고 있다. 용의주도하고 직감이 번득이지만 평소 태도는 유하기가 수양버들이다.

양근환 수하의 맏형 격으로 불 같은 보스의 과격함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지만, 각오만은 오지다. “아쉽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어줘야 할 사람이 있는 거요. 한 사람의 죽음이 대세를 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정의가 똑바로 서고 질서가 잡혀 있으면 우리들이 비상수단을 쓸 필요가 없지요.” 이에 누가 무엇으로 그 걸 정하느냐며 이종문이 무식함과 술기운을 빙자해 덤벼본다. 대답은 이렇다. “대의를 위해 어떤 사람을 죽일 작정을 하면 죽이는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하는 겁니다. 내 생명과 그 편의 생명을 상쇄한다는 얘기죠. 나와 상대방을 상쇄한다. 이게 테러리스트의 각오이며 윤리이며 명분이오.”

자신이 죽어야 테러리스트도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러니 테러리스트의 고백은 미완일 수밖에 없다. 문창곡은 설령 테러가 성사되고 테러리스트는 목숨을 부지했다 해도 그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산하’ 로푸심, 러시아 작가 사빈코프 롭신 차용

‘산하’엔 로푸심이란 신비한 인물도 등장하는데, 그 또한 아나키스트다. 온 몸이 무술로 정한하게 단련되어 있는가 하면, 상하이 후장(扈江) 대학에서 수학했던 문무겸전의 인물이다. 5개 국적을 가진 세계인이면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천생 노마드다.

해방정국에서 어느 정치인도 지지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는 뚝심을 보인다. 광복 1주년 기념식이란 정치 일정이 있는 날도 좌우 어느 한쪽의 행사에 참석하는 대신 훌쩍 북악산에 오른다. 마침 비슷한 생각으로 산에 오른 이동식과 조우하며 그의 인생이 극적으로 변한다.

로푸심은 생의 마지막 정열을 친구 이동식과 그 가족을 위해 희생하기로 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전초 부대에 기꺼이 자원한다.

로푸심이란 이름은 그가 흠모했던 러시아 작가 사빈코프 롭신(보리스 사빈코프·사진)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롭신은 ‘창백한 말(馬)’이란 소설에서 테러리스트의 고백을 그린 바 있는 아나키스트였다. 테러 단체를 이끌기도 하고 반 볼셰비키 운동을 지휘하기도 한다. 동료의 배신으로 체포되자 자결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로푸심은 자신의 비극성을 롭신과 비견하며 그 소설의 번역 작업도 한다. 이 소설의 “한때 여왕처럼 군림하던 여자가 이제 창녀처럼 사랑을 구걸하고 있다”는 구절은 나림이 여러 소설에서 거듭 인용하는 문구다.

로푸심은 ‘서노일체(恕怒一體)’란 글을 좌우명으로 걸어 놓고, 끝내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 민족도 배반하고 마약으로까지 해악을 끼친 인물을 기어이 찾아내서 응징하고 죄상을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드러낸다. 이른바 장충단고개 사건이다. 문창곡은 그 사건의 범인이 잡히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구출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테러리스트들의 의기가 투합하는 대목이다.

다만 나림의 뜻은 좀 더 깊다. ‘지리산’의 한 대목이다. “보복과 복수는 있어야지만 그게 보람을 갖자면 시간 장소 사정을 선택해야만 한다. 호랑이이면 호랑이 시절에 보복해야지 상가의 개꼴이 된 상황에서의 매질은 오히려 마음이 상할 뿐이다.” 응징은 응징다워야 한다는 것이고, 응징에도 위신과 품격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언어학자로 유명한 아나키스트 노엄 촘스키는 ‘권력과 테러’에서 “강한 자의 약한 자에 대한 테러리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약한 자의 강한 자에 대한 테러리즘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강한 자의 약한 자에 대한 테러는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고,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다.

■개인에 대한 국가 테러 비판

나림은 국가의 개인에 대한 테러에 특히 주목했다. 장군의 사상과 철학자의 사상이 같아야만 하는 시대에 단지 다른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형장에서 스러진 인물에 대한 기록이 애틋함을 넘어 통분이다. ‘그해 5월’에는 혁신계의 대표 인사 최백근과 민족일보사 사장 조용수의 사형 선고 이유와 집행 과정이 소상하다. 제자 조용수가 사법살인 당한 날인 1961년 12월 21일을 기록하면서 “어떤 역사는 이 날을 기점으로 해서 그 사문(査問)을 시작했다”고 썼다. 통곡 끝에 가슴이 파삭파삭 말라버린 느낌의 대목이다.

조용수는 교수대에 오르기 2년 전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 듯 동분서주하며 조봉암의 구명운동에 진력했었다. 조봉암이 마지막에 술 한 잔을 청하며 “희생자는 나로서 그치기를 바란다”고 유언했다는 대목은 단편 ‘칸나·X·타나토스’에 선명하다. 칸나가 가득 담긴 화병이 깨어져 뒹구는 무참함과 대비하고 타나토스까지 등장시킨 나림의 뜻이 처절하다. 강한 국가의 약한 개인에 대한 테러도 언젠가는 사문되고 새로이 평가될 것이란 나림의 기대는 결국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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