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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4> 이병주와 다른 작가들

“이문열·조정래 문학 속 아나키즘, 나림의 식견과 통찰력엔 못 미쳐”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5-22 19:54:09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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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려한 문장 자랑하는 이문열
- 공부만을 위해 아나키즘 관심
- 부친의 사상 행적 추적에 그쳐

- 조정래 ‘태백산맥’ 호흡 긴 문장
- 나림 ‘지리산’은 표현 간결·압축
- 많은 공력 쏟아 흡인력 압도적

- 자유의 정의 찾으려 한 김동리
- 진기·루소·공자의 사상 결합해
- 자유지향적 아나키스트 표방

학(學)으로나 지(知)로나 색(色)으로나 주(酒)로나 나림에 방불 하는 소설가는 없다. 평론가 김윤식은 임종을 앞둔 병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병주라고 답했고, 인간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도 역시 이병주라고 답한 바 있다. 임헌영은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에서 가장 중요한 문인으로 조정래와 박경리 그리고 이병주를 꼽았다.
근대 시기 중국 상하이의 와이탄 전경(왼쪽). 일제에 의해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끌려갔던 이병주는 해방 직후인 1945년 상하이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 그즈음 상하이는 아나키즘 활동이 활발한 도시였다. 오른쪽 사진은 운무가 밀려온 지리산 노고단 풍경이다. 이곳은 작가 이병주가 쓴 소설 ‘지리산’의 중요 무대다. 국제신문 DB
■ 여러 작가와 작품

이병주처럼 박력 있고 남성적인 글을 쓰는 작가는 지금 우리에겐 없다. 유일하게 비교할 만한 작가는 이문열이다. 나림의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인정한 이문열의 경우, 오히려 나림보다 더 우미하고 유려한 문장에 더 정교한 구성을 자랑하며 더 의고체(擬古體) 글을 쓰지만 스케일이나 볼륨에선 미치지 못한다.

청·장년기 경험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문열이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난독하며 인사와 세사를 익힐 나이 때, 나림은 일본에서 양사(良師)와 익우(益友)를 만나거나 유럽 여행을 한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이 1960·1970년대 분단 한국으로 한정됐다면, 나림의 젊은 날은 식민지에서 일본으로 다시 중국으로 종횡사해했다. 같은 재능이라 하더라도 견식 차이가 분명하다.

아나키즘과 관련, 이문열은 부친의 사상적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기락을 찾아가 몇 차례 배우지만 그저 주변을 서성이다 만 정도다. ‘신동아’에 연재한 ‘둔주곡 1980’에서 이문열 스스로 하기락의 “결국 자네는 우리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말로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문열은 바쿠닌의 원서를 빌려 보는 등 아나키즘에 관심을 보이지만 다분히 공부를 위함이었다. 그 공부가 부친을 그린 ‘영웅시대’에 활용된다. 이문열의 아나키즘 열독은 월북한 부친의 청년 시절 사상적 기반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환에 그쳤다.

일찍이 아나키즘을 장편소설에서 다룬 작가는 김동리다. ‘자유의 역사’가 바로 그 작품이다. 김동리가 아나키즘이 가장 중시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그려보기 위해” 쓴 것으로, 1959년 일이다.

주인공 김인식은 자신의 일기 ‘표박자(漂泊者)의 수기(手記)’에서 아나키즘을 습득하게 된 사연을 소상히 기록했는데, 사상적 스승 진기(陳琦)의 “인자한 무정부주의” 내용이 독특하다. 진기라는 중국인 학자는 품이 큰 인물이다.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 군복을 입은 낯선 한국인 청년을 동정해 집안에 들이고 외동딸과의 교제도 허용하며 급기야는 사위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진기와 김인식 두 사람의 극적 만남은 무엇보다 자유라는 가치에 강력한 유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병에서 탈출한 이유를 묻자 김인식은 딱히 선명한 의지가 있어서는 아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자유롭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진기가 그런 그에게 처음 권한 책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과 루소의 ‘민약론’이다. 거기에 공자 사상을 더한다. “루소의 양심과 크로포트킨의 자유는 감정적 만족을 줄 뿐 현실적 근거가 박약해 바쿠닌식의 극좌적 파괴주의로 가거나 공산당에 이용당하기 때문에 공자의 현실주의와 인의주의(仁義主義)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노자나 장자가 아닌 공자를 전거로 든 건 아주 독특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 공자와 아나키즘?

경남 하동군 이병주문학관에 모형으로 구현해놓은 소설 ‘지리산’ 전투 장면.
대부분 아나키스트는 전통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더러 우량한 전통에 우호적이거나 심지어 경의를 표하는 사상가도 있다. 중국 근대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류스페이(劉師培)는 도덕으로 권력의 악성을 감싸고자 하는 유가사상은 권력의 허화(虛化)를 강조하느니만큼 아나키즘 친화적이라고 주장한다. 유정(有情)하며 품격 있는 천하를 지향하는 유가사상은 바로 아나키즘의 지향과 유사하다는 뜻이다. 사실 아나키 사회는 구성원이 자율적이고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자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다.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의 연합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품성의 배양을 강조하고 자발적인 배려와 양보를 주장하는 공자의 사상은 아나키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아주 유용한 기반이 될 수 있다. 공자가 구상한 사람다움과 세상다움은 아나키즘의 이상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진기의 크로포트킨 더하기 루소 더하기 공자의 아나키즘은 그런 맥락에서 류스페이 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훈도를 받은 김인식은 충칭의 임시정부에 가서 독립투사 부친의 순국을 확인하고, 아나키즘 계열 인사와 어울린다.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는데, 당시 충칭엔 단주 유림이 있었다. 다만 김인식 스스로 “성실하고 진지한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그저 자유지향적인 표박자일 뿐이다”고 하며 스스로 건달이라 규정한다. 다소 나이브한 얼치기 아나키스트라 할 만하다. 사상적으로 치열하지도 않고, 성실하거나 도덕적이지도 않다. 이념형도 아니고 생활형도 아닌, 그냥 좀 나른하다.

김훈은 부친과의 오랜 은원을 ‘공터에서’에서 해소한다. 무협지 주인공처럼 호방하게 산 부친은 아들 김훈에게 술빚만 잔뜩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문인의 자질을 주었고 술기운에 불러주는 연재소설로 글쓰기도 가르쳤다. 그 부친이 1930년대 상하이에서 아나키스트 단체 남화한인연맹 멤버와 교유했던 김광주다. 김광주는 그 시절 정해리와 이하유 등 아나키스트 선배의 훈도와 아낌을 아낌없이 받았다. 다만 김훈은 예의 각박한 문투로 부친의 행적을 굳이 무심하게 묘사한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본다. 흔히 나림의 ‘지리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비교한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아예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선, 두 작가의 공력 차이다. 나림의 ‘지리산’은 일제 말기 학병 문제부터 해방정국 좌우 이념 대결 그리고 빨치산 이야기까지 내용을 전체적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그 기반 위에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그려간다. 작가가 스토리와 캐릭터 모두 온전히 장악하고 실타래 풀 듯 풀어가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아나키즘 등 정치사상 전반에 관한 이해는 물론이고, 남북문제와 국제관계에 대해서도 해박하고 균형 잡힌 견식을 갖고 있다. 특히 권창혁과 박태영을 통해 분석하고 평가하는 공산주의 일반과 소련 공산당 조선공산당의 행태 대목은 압권이다. 당대를 주도한 정치인과 지식인과도 교유가 많다 보니 에피소드도 아주 실감 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전체 분량 10권 중 4권까지가 한계다. 길게만 쓴다고 장편이 아니다. 작가의 역량을 넘어서는 독자의 기대와 호응이 작가를 발분하게 하는 것까진 준수하나 벼락치기 공부로 만족을 줄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내용의 수준이 들쑥날쑥하고 캐릭터가 흔들흔들한다. 급기야는 열성적인 독자와 1980년대 시대적 분위기에 영합하기까지 한다. 작위적이고 그만큼 설득력도 떨어진다.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명쾌하게 서술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음, 취향 문제라고 할 수도 있을 문체 차이다. 나림은 시작하는 문장이 간결하고 묵중하다. 이를테면 “산은 살아 있다.” “계절은 추워도 정치 열풍은 거칠었다” 고 하는 식이다. 지리산의 사계를 묘사할 때도 한두 마디로 압축할 뿐이다.

조정래는 주절주절 문장이 길다. 지리산에 봄이 왔다는 묘사가 한 장이 다 되도록 늘어지기도 한다.

문체에 대한 호오는 독자의 취향이니 그렇다 하고, 적어도 공력에 있어서만큼은 두 작가를 대등한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천하의 루쉰(魯迅)도 그랬다. “반응을 얻지 못하는 창작은 공허하다”고. 책은 자고로 읽혀야 보람이다. 다만 ‘태백산맥’이 더 많이 읽혔다고 ‘지리산’보다 나은 소설이란 주장만 하지 않았으면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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