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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인간극장] <15> 함양방짜유기 - 이점식 방짜유기장

수 천 번 두드림의 미학 ‘황금빛 유기’… 그 기술로 외국악기 제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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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석 녹여 굳힌 20㎝ 덩어리
- 달구며 망치질로 매끈하게 한 뒤
- 직접 두께 조절해가며 소리 조율
- 경쾌한 울림 주는 꽹과리로 탄생

- 신라 때부터 함양 유기공방 성행
- ‘징장’ 부친 가업 이은 이 유기장
- 두 아들도 전수생으로 전통 이어
- “유기로 심벌즈 만드는 게 목표”

수 천 번 망치질로 탄생하는 놋쇠 그릇 유기(鍮器). 그 중 최고는 징과 꽹과리다. 유기 중 악기는 제작과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최근 취재팀은 경남 함양 서하면에서 이점식(63) 방짜유기장(경남 무형문화재 44호)을 만났다.
벼름질(울음잡기) 중인 이점식 방짜유기장. 이우정PD
두드려서 만든다는 뜻의 ‘방짜’유기공장에 다다르자 쇠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유기장은 굵은 땀방울을 연신 훔치며 꽹과리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1000도가 넘는 불가마 열기에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불메꾼(불을 다루는 사람)이 달궈진 시커먼 바둑(동이나 주석을 녹여 바둑알 모양으로 납작하게 굳힌 약 20cm 덩어리)을 꺼내 이 유기장에게 전달한다. 이 유기장은 바둑의 중심을 때리며 옆을 새웠다. 두께와 크기가 꽹과리처럼 얇게 될 때까지 때리고 달구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점식 방짜유기장. 이우정PD
모양이 잡힌 바둑은 이 유기장 아들인 이상운 전수장학생이 다듬는다. 기계를 이용해 울퉁불퉁한 표면을 깎자 불꽃이 사방으로 튄다. 망치로 두드려 마무리하고 물 속에 담군다. “치익!” 소리와 함께 열이 빠져나간다.

이제 열기가 식은 바둑에 소리를 입힐 차례. 징·꽹과리 같은 악기와 유기 그릇은 두께에 차이가 있다. “유기 그릇은 일정한 두께로 만들지만 악기는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두께가 달라요. 두께의 미세한 차이가 소리를 만듭니다.”

이 유기장은 매끈해진 바둑에 직접 홈을 새기고 두께를 조절하며 소리를 조율했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사람처럼 악기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직접 다듬으면서 조율해야 돼요. 소리를 불어 넣는 과정이죠.” 이 유기장의 손길에 둔탁한 소리를 내던 바둑은 어느새 경쾌한 울림을 발산하는 꽹과리로 탄생했다.

전수장학생 아들들과 작업 중인 이 유기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요즘은 기계를 이용해 하루에 징 30개도 거뜬하지만 과거 전통방식으로는 하루에 3개 정도 만든다. “과거엔 6명이 한 조를 이뤘어요. 풍구(풀무, 바람을 넣어 불을 지피는 기구)를 이용해 불을 지펴 용해(주석과 동을 녹이는 과정)하는데만 하루가 걸렸죠.” 지금은 유압기계를 이용해 금방 모양을 잡지만 과거엔 대정(제작 조장)의 구령에 맞춰 앞매·전매·샛매(쇳매) 세사람(대정을 보조하는 역할)이 망치로 바둑을 두드리며 형태를 만드는 뉘핌질(네핌질)을 했다. 두께가 얇아져 깨지기 쉬운 바둑을 두 세장씩 겹쳐서 가마에 달구는 작업(우김질)으로 이어진다.

다시 가마에서 겹쳐둔 바둑을 꺼내 한장 씩 때어낸다(냄질). 이 유기장은 “냄질하면 이제 우글우글한 표면을 망치로 두드려 잡아주는 ‘닥침질’을 합니다. 그런 다음 바둑 표면을 갈아서 꽹과리와 비슷한 모양을 만드는 ‘부질’이 이어지죠”라고 설명했다. 모양이 어느 정도 완성된 바둑은 담금질을 거친 뒤 소리를 조율한다(벼름질 또는 울음잡기). 마지막으로 표면에 시커먼 자국을 갈아내는 작업(가질)이 끝나면 비로소 악기가 완성된다.

함양방짜유기 공장에서 생산하는 유기 그릇과 꽹과리. 이우정PD
경남 함양에선 예로부터 유기 공방이 성행했다. 명나라 학자 이시진이 엮은 약학서 ‘본초강목(本草鋼目)’에 “신라 동(銅)은 종을 만드는데 좋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함양의 동은 품질이 뛰어났다. 차고 깨끗한 물과 땔감에 쓸 울창한 산림도 유기 제작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유기장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함양에 징점(징 공방)이 16곳이나 있었다. 1년 중에 여름을 제외하고는 보부상들이 장날이 되기 전에 징을 10개씩 사가고 그랬다” 며 과거를 회상했다.

근대화와 함께 유기공장에도 기계가 도입되면서 많은 공방이 문을 닫았다. 함양에서 징을 만들던 이 유기장의 부친 이용구 징장은 서울로 올라가 징 제작을 이어간다. 당시 16살이었던 이 유기장은 중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유기 제작을 배웠다. “유기를 접한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어린시절부터 온 동네가 유기를 만들면서 서로 도우며 살았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업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 유기장은 서울 염창동에서 부친과 함께 지인의 일감을 받아 생계를 이어갔다. “군대 전역하고 머리 자라기도 전에 싱가포르에 1년 동안 건설노동자로 일하러 갔어요. 돈 벌러. 한 1000만 원을 벌어서 귀국했어요.” 그때 1000만 원이면 서울에 60평 단독주택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아버지가 집 사자고 했죠. 근데 저는 유기 공장을 짓자고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어나가자고 설득한 거죠.”

마침내 서울 수색에서 방짜유기 공장을 열었다. ‘함양에서 온 방짜유기 공장이 생겼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제작의뢰가 들어왔다. 전국 도매상들이 와서 사갈 만큼 전성기였다.

이 부자는 2년간 서울에서 공장을 운영하다 함양으로 귀향했다. “경남 거창에서 유기 일을 하시던 지인이랑 함께 작업하게 되면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부친 이용구 선생이 은퇴하면서 현재는 이 유기장이 모든 일을 맡고 있다.

이 유기장은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기 제작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이다. “주석이 원래는 1kg당 1만8000원에서 2만 원 했는데 지금은 6만 원까지 올랐어요. 동도 6000원 하던 게 1만5000원까지 폭등했습니다. 우리 물건을 사가는 도매상들이 마진을 남길 수가 없을 정도에요.”

펜데믹으로 방문객 발길도 크게 줄었다. 이 유기장이 백화점이나 홈쇼핑까지 판로를 개척하고 있는 이유다. “이 공장도 빚으로 시작했는데 지금 물가가 다 오르니까 빚을 다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유기장은 방짜유기장이라는 책임감 하나로 버티고 있다.

열 여섯부터 시작해 예순이 넘은 현재까지 이 유기장의 인생은 방짜유기로 가득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관두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 전통 기술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넘어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쉽게 놓을 수가 없어요.” 그의 두 아들도 현재 방짜유기 전수장학생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올해 이수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 삼대에 걸쳐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 셈이다.

“심벌즈(두 개의 원반을 서로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금속 타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이 유기장은 오래 동안 간직한 계획을 소개했다. “심벌즈가 유기랑 거의 똑같아요. 우리 기술로 심벌즈를 만들어 보는 게 목표입니다.” 아직 그의 목표는 현재진행형. 머지 않아 함양방짜유기 기술로 만든 심벌즈를 콘서트에서 볼 날도 오지 않을까.

※ 제작지원 B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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