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악가 꿈꾸다 문예창작 전공
- 고유의 말로 아름다움 설명한
- 미술사학자 혜곡의 글에 빠져
- 전국 박물관·미술관 곳곳 누벼
- 문화재 가치 담은 소설 펼쳐내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얼마나 많을까. 이 땅의 사기장들이 빚은 도자기, 화공의 그림, 책자 등 그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다. 수천만 점이라는 수치가 있다 해도 그것이 전부이겠는가. 수치 이상일 것이다. 빼앗긴 문화재 생각을 일상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일단 그 생각이 나면 화가 난다.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 무사히 이 땅에 남아 있는 문화재와 미술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만들고 빚고 그렸을까, 누가 그 가치를 알아보았을까, 누가 지켰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을 만났다. 이병순 소설가의 장편소설 ‘죽림한풍을 찾아서’이다. 대숲과 바람, 그것을 찾는다는 소설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든다. 이병순 소설가를 부산 남구 대연동 수목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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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남구 대연동 수목원에서 만난 이병순 작가는 고미술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
■문화재와 골동품에 대한 관심
이병순은 부산 남구 문현동에서 태어나 대연동에서 계속 살았다. 대연동 수목원은 그에게 익숙하고 편한 곳이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채운다. 나무 그늘에서 쉬기도 한다. 수목원을 찾아온 시민도 그렇게 걷고, 쉬고 있었다.
문학에 뜻을 둔 것이 언제였는지 물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요. 성악가를 꿈꾸었고, 음악을 좋아했답니다.”
글과의 인연을 물었더니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이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 다른 아이들은 적당히 꾸며서 썼는데, 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썼지요.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글은 이렇게 쓰는 거라며 칭찬도 해주시고, 학급 게시판에 제 글을 붙여 주셨답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을 좋아해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와 소설을 많이 읽게 됐지요. 그러면서도 제 꿈은 음대를 가는 것이었는데, 결국 음대는 못가고 문예창작과로 진학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월급을 모아 제일 먼저 한 것이 오디오 시스템을 구비하는 것이었다. 소설 이야기는 언제 나오는 거지 싶을 정도로 음악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월급 받는 족족 클래식 음반을 사서 들었어요. 클래식 전문 라디오 채널을 맞추고 공테이프에 녹음도 했지요.” 골동품에 미친 소설 속 소장자들의 수집벽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30대로 접어든 어느 날 이병순은 어머니와 함께 서점에 들렀다가 미술사학자이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혜곡 최순우의 글을 모은 5권 세트 책을 보았다. 혜곡은 그가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름이었다. 중학교 1학년 국어책에서 본 혜곡의 수필, 그리고 중학교 수학여행 때 방문한 국립중앙박물관이 떠올랐다. 5권의 책에서 읽은 혜곡의 글은 이병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 미술품을 대하는 마음도 깊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글에서 큰 감명을 받았지요. 우리 고유의 말로 이렇게 아름답고 정겹게 표현할 수 있구나! 실제로 느껴보고 싶어서 그때부터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병순은 도자기 한 점, 그림 한 폭 앞에 서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에서 TV프로그램 ‘진품명품’ 촬영을 할 때 그 현장에도 갔다. 미술품 경매장에도 다녔다. 그 동안 문화재, 골동품과 관련한 이야기도 하나씩 쌓였다.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단편소설집 ‘끌’을 출간하고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우리 미술품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그렇게 태어났다. 오랜 시간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였다.
■ 죽림한풍의 주인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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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림한풍을 찾아서-
이병순 지음 / 실천문학사 / 2021 |
‘죽림한풍을 찾아서’는 일제 강점기 때 미술품을 경매하던 ‘경성미술구락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서사로 풀어냈다. 병신년에 태어났기에 ‘강병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명 화공, 골동품에 미쳐 전 재산을 바쳤다 해서 ‘동치’라고 불리는 인물의 만남이 긴 이야기의 시작이다.
병신은 동치의 주문을 받고 대숲에 부는 바람을 담은 ‘죽림한풍’을 그렸다. 4년에 걸쳐 혼신을 바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알아본 동치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주었다. 병신이 그림을 그릴 때 손자 강석초는 먹을 갈았고,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있던 동치는 ‘죽림한풍’에 빠진 손자 김종하에게 그림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동치의 집안이 무너져 그 아들이 부친의 소장품을 팔며 이사 설거지를 할 때, 병신은 불쏘시개가 되기 직전의 그림을 가까스로 되찾아왔다. 그러나 동치와 병신이 연이어 세상을 뜬 후 그림은 사라졌다. 훗날 김종하는 그림의 가치를 알기에 찾고, 강석초는 조부의 그림을 모두 찾아 미술관을 만들려 한다.
김종하와 강석초를 따라가면 당시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볼 수 있다. 고적탐사라는 이유를 대고 조선의 땅과 무덤을 파헤치는 일본인들,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거금을 뿌리며 미술품을 사는 일본 소장자들, 그 사이에는 조선의 소장자들도 있다. 소설이지만 실제 사실이나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누가 ‘죽림한풍’의 최종 소장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게 가장 흥미진진하다. 소설 마지막은 경성미술구락부 ‘죽림한풍’의 경매현장에서 마주한 김종하와 강석초의 긴장으로 끝난다. 무명 화공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기에 처음부터 무관심인 사람들 속에서 두 사람은 그림을 갖고 싶은 열망으로 절박하다. 누가 그림을 가졌으면 좋을까. 소설을 읽은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아름답고 순박한 우리말이 소설 속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 읽는 재미 또한 각별하다. 책의 첫 장이며 병신의 회고록인 ‘병신유고’는 소설 속 소설이다. 그 중 병신이 대숲을 보는 장면을 보자. “동치 그림 주문을 받은 그날로 나는 대숲을 더 살뜰하게 맴돌았다. 안적사 비탈에 무너질 듯 사선으로 뻗은 대숲을 종일 바라보고 왔다. 사락사락, 바삭바삭, 시비적시비적, 홀싹홀싹, 파그작파그작, 노작노작, 휘리릭휘리릭, 쏴쏴쏴, 화락화락. 대바람소리는 갖추갖추였다.” 그 소리를 담아내는 말이 이렇게 ‘갖추갖추’이다. 대숲의 바람이 보인다. 죽림한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