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형문화재 보유자 후보 임 장인
- 칼자루·칼집 만들어 문양 새기고
- 칼날 제작까지 모든 공정 수행
- 왕 하사품·예물 등 사치품이면서
- 서민 생활용품이기도 했던 장도
- ‘실용적 공예품’ 인기 누렸지만
- 1960년대 커터칼 등장 이후
- 순식간에 역사 뒤안길 밀려나
- 명맥 잇기조차 어려운 현실
- “쓰임새 잃었다고 멈출 수 없어
- 선조 기술 후대에 잘 물려줘야”
은장도(銀粧刀)가 여성 정절의 상징으로 떠오른 건 현대에 와서다. 꾸밈칼로도 불리는 장도(粧刀)는 고려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다양한 용도로 애용되던 생활용품이었다. 군주가 관직에 오른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이자 혼례함에 포함되는 예물의 하나였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새겨넣어 장신구 기능도 했다. 그럼에도 TV 사극에서 여성이 자신의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 탓에 잘못된 인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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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장식 장인이 장도의 자루집을 불에 달구고 있다. 이우정 PD |
장도는 고려가 원나라와 교류할 때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목 민족이 사용하던 단도를 우리 풍속에 맞도록 개량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원나라에서 유입된 단도는 칼집이 없는 투박한 형태였지만 우리 선조들은 보관의 편의성을 위해 칼집을 만들었다. 칼집 재질에 따라 목장도(나무)나 은장도로 불렸다. 칼날은 예외 없이 강철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장인들이 열처리해 만든 강철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합금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가장 견고한 칼날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들어 장도는 일반 백성들도 사용할 만큼 보편화된다. 서민들은 주로 목장도를 주문했다. 은젓가락이 포함된 첨사도는 당상관급의 고위 양반만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 외부에서 식사를 하거나 음식물 속에 독이 들었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용도로도 사용됐다.
궁궐에는 왕실과 중앙관청이 사용할 물품을 제작하는 경공장(京工匠)이 따로 있었다. 이들의 생산 목록에 늘 장도가 포함됐다. 당시 장도는 적어도 3개 분야의 경공장이 분업해 제작했다. 장도의 주인이 정해지면 이에 걸맞은 소재로 칼자루와 칼집을 재단한다. 자루·집에 문양을 새기는 세공은 다른 장인의 몫이다. 그 사이 장도의 칼날을 만들기 위한 주물 작업이 완료되면 칼자루와 결합한다. 하나의 종합예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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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장식 장인이 올해 4인시에 만든 인월도. 진주시 장도장전수교육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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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장도장(粧刀匠)은 세 가지 작업을 홀로 수행한다. 중앙·지역 무형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장인 가운데 요즘도 여전히 장도를 만드는 이는 경남 무형문화재 10호 장도장 보유자 후보인 임장식(62) 장인이 유일하다. 부친이자 선대 보유자인 임차출(1987년 경남도 무형문화재 지정) 선생 사후 보유자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경남도와 진주시는 사실상 임 장인을 보유자로 인정해 전수관 사용 및 제작·후학 양성을 지원하고 있다. 진주 장도장전수교육관에서 임 장인을 만나 전통 장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 죽이는 무서운 칼, 장도에 대한 편견을 벗겨내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정말 어렵더군요. 장도가 이렇게 무서운 칼로 인식돼 있다 보니 선물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민간에서 장도를 찾는 사람이 사라진 건 이런 이유도 크다고 봅니다. 물론 전통 장도를 계승해나가는 데도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임 장인의 하소연이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장도는 1960년대 후반까지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널리 사용됐다. 그는 “연필을 깎거나, 과일을 자르거나, 수염을 다듬을 때도 장도를 사용했다. 스님들은 품에 장도를 넣고 다니며 머리를 밀 때도 썼다”고 설명했다. 과거 가장 많이 만든 장도는 새 을(乙) 자와 비슷하게 생긴 새을자도였다. 진주에서 장도를 만들어 대구·대전의 관광지나 경주 수학여행지에서 팔면 수입이 꽤 괜찮았다고 한다. 경남에선 한 마을 전체가 장도 제작으로 생계를 이었던 사례도 있다.
장도의 위상은 1960년대 후반 공장들이 칼을 대량 생산하면서 꺾인다. 임 장인은 작업장 한 켠에서 접이식 커터칼을 꺼내보이며 “간단한 장도라도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평균 2, 3일 걸린다. 반면 커터칼은 순식간에 찍혀나온다”며 “가격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무리 공임을 낮추더라도 장도가 1000원이라면 커터칼은 100원이다. 더 가볍고 보관도 편리하다. 애초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실용성을 띠던 전통 공예품이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셈이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문화재 예·기능 영역까지 제한을 둔 것도 악영향을 끼쳤다. “내가 만든 장도 가격은 개당 수십만~수백만 원대입니다. 이전엔 경남도지사가 해외를 방문할 때 장도를 선물용으로 구입하곤 했는데 김영란법이 제정되면서 ‘관청 납품’은 완전히 끊겼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자 키우는 일도 쉽지 않다. 현재 임 장인의 전승 계보에는 이수자 한 명밖에 없다. 임 장인은 “장도의 매력에 빠져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꽤 있다. 대부분 직장인이다”면서 “코로나19로 전수관이 2년 넘게 폐쇄되다시피 했다. 계속 배움에 뜻을 둘 후학이 얼마나 되는지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장도를 만들 때 느끼는 재미는 전통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젊었을 적엔 쪼이질(새가 모이를 쪼듯 망치로 정을 미세하게 쳐 금속 위에 문양을 새기는 장도 기법)에 희열을 느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요즘은 세태 변화로 인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제약이 크다. “대장간이라는 건 역사책에나 등장할 뿐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게 됐어요. 장도장이라면 세공과 주물 작업에 모두 능해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풀무를 다루는 일은 대장간에서 10년은 배워야 할 수 있는데 가르칠 여건이 잘 안 돼요.” 이런 탓에 임 장인의 제자들은 장도에서 ‘날’ 기능은 제쳐둔 채 칼자루와 칼집을 세공하는 것만을 제한적으로 배우고 있다.
올해는 임 장인에게 각별한 해다. 조선 임금이 지니는 장도는 인월도(寅月刀) 또는 사인검(四寅劍)이라 불렸다. 모두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寅) 자가 들어간다. 12년에 한 번 4개의 인시(호랑이를 상징하는 해·월·일·시)가 겹칠 때 장인은 오직 임금만을 위해 벼린 날로 장도 등 무구를 만들었다. 호랑이의 영험성이 날에 깃들어 주군을 지켜주길 바라는 의미다. 임금 아닌 다른 자가 4인시에 만들어진 칼을 지니면 그 자체로 반역. 올해 4인시는 지난 2월 18일 새벽 3시~5시 사이였다. 임 장도장 또한 이날 정성을 다해 날을 가다듬었다.
이 장도가 제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임 장인은 “원래 칼날을 만들고 나면 ‘군자도’나 ‘일편심’이라는 글귀를 날에 새겨 넣었다. 요즈음은 ‘군자도’는 새기지 않는다. 군자라 할 만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장도가 쓰임새를 잃고 뒷전으로 밀려난 듯 보이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도 선조의 기술을 후대에 올바르게 물려주는 게 내 사명입니다. 언젠가 인월도나 군자도를 자격 있는 이의 손에 쥐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 제작지원 B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