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예나 서화의 도구 뛰어넘어
- 기술발전에도 대체불가한 붓
- 만드는 필장과 유통하는 필상
- 과거 고급기술자로 대우 받아
- 울산시 무형문화재 3호 김 씨
- 10대 때부터 평생을 바친 장인
- 1m 산마필 수천만 원 호가도
- “1950년대 내놓는 족족 팔려
- 수요 줄며 배우려는 이 없어
- 기력 따를 때까지 이어갈 것”
필화(筆禍)의 사전적 의미는 ‘붓으로 쓴 글 때문에 일어난 사단’이다. 붓은 단순히 서예나 서화의 도구를 뛰어넘어 하나의 선비정신이자 권력에 대한 항거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예나 지금이나 붓은 쓰임에 따라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기도 하고 때로는 입신양명의 수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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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춘 모필장이 붓을 만들고 있다. 이우정 PD |
붓은 누구나 한 번쯤 쥐어 봤음직한 물건이다. 붓은 다른 필기구와는 구분되는 대체 불가성을 갖고 있다. 펜이나 연필·크레파스·파스텔로는 대신할 수 없는 붓만의 독특한 쓰임새 말이다. 한없이 섬세하면서 때로는 화폭을 찢어발길 듯 거칠다. 기술이 발달해 글쓰기 도구가 PC 자판으로 대체된 요즘도 붓은 뒷방으로 밀려나지 않고 고유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붓의 연원은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근거는 중국 신석기 시대와 상주·서주시대 유적인 앙소 채색토기. 이 토기에서는 ‘붓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새겼다고 볼 수 없는’ 문양들이 발견된다. 붓의 ‘대체 불가’가 논거인 셈이다.
당시 붓도 현재처럼 동물의 털을 모아(촉) 나무관(붓대)에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좋은 붓은 ‘생명선’이라고도 불리는 촉 끝이 날카로워야 한다. 붓모는 굽은 털 없이 길이가 가지런해야 한다. 탄력이 있으면서도 유연해야 먹을 균일하게 뿌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모난 데 없이 둥글며, 낱낱의 털은 곧으면서 수명이 길어야 한다.
국내에선 족제비 꼬리털, 소·양의 겨드랑이털, 산토끼털 등이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있는 붓모로 사용돼 왔다. 털을 삶아 기름기를 뺀 후 빗질로 가다듬기를 수백 차례, 정돈된 털을 촉으로 모아 붓대에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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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춘 모필장이 제작한 산마필. 크리애드 제공 |
울산시 무형문화재 3호 김종춘(80) 모필장은 10대 시절부터 전통기법을 지켜 붓을 만들어온 장인이다. 김 모필장의 울산 작업장을 찾아 70년 가까운 세월을 붓 만드는 데 바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 모필장은 6·25 전쟁이 끝난 16세 나이에 경남 밀양에서 붓으로 일가를 일군 김형찬 선생 필방에서 붓을 배웠다. “스승의 필방에서 일하던 기술자가 20명, 그 기술자마다 딸린 조수가 1, 2명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다’라고 표현하던 조수에게 정식 월급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한 달에 하루 꼴로 휴가를 주며 그때 쓸 수 있는 용돈 정도를 챙겨 줬다고 한다.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붓 만드는 일을 배운 지 3년 만에 김 모필장은 스승으로부터 호비칼·치계(치게)·작죽칼(치죽칼)을 받을 수 있었다. 호비칼은 나무의 속을 파내는 데 쓰이는 칼이다. 치계는 붓모를 빗어 정돈하는 데 필요하다. 작죽칼(치죽칼)은 붓대가 되는 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을 때 사용된다. 붓을 만드는 데 필요한 3가지 핵심 도구이자 스승이 ‘필장’으로 인정한 제자에게 하사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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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춘 모필장이 제작한 대형 산마필. 크리애드 제공 |
이후 김 모필장의 자취를 따라가보면 근대와 현대를 잇는 붓 제작·유통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이름 높은 스승에게서 칼과 치계를 하사받은 필장이라고 해서 곧장 자신의 필방을 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어딜 가든 굶어죽지 않는 고급 기술자로 대우받았다. 이들 필장을 모셔다가 붓을 만들게 하고, 이 붓을 직접 유통하던 이들이 필상(筆商)이다.
김 모필장이 스승의 그늘을 떠나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이는 대전 필상 박원서 씨였다. 그는 박 씨의 집에 3개월간 머물며 붓을 만들었다. 박 씨는 초등학교 문방구와 필방에 이를 내다 팔았다. 김 모필장은 “1950년대는 아직 연필·펜보다는 붓으로 글자를 쓰는 이가 더 많던 시절이다. 내놓는 족족 팔려나가는 재미에 정신 없이 붓을 만들어내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고급기술을 배우려 수소문하던 김 모필장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광주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그는 광주 ‘진다리붓’의 대가 안종선 선생의 문하에 들어 기술을 익힌다. 진다리붓은 흰염소의 겨드랑이털로 제작하는데, 수컷의 털만을 사용하며 시기적으로는 매년 1~3월 사이 모은 털을 최상품으로 친다. 황토흙과 쌀겨를 섞어 먹인 오죽(烏竹)을 짚으로 문지른 뒤 햇볕에 2, 3개월 말려 한 토막씩 자른 것을 붓대로 사용한다.
밀양과 광주의 명인들로부터 붓을 배운 김 모필장은 이후 광주와 밀양, 대구 등지에서 제작을 이어가며 이름을 떨쳤다. 1968년 대구필상 이쾌돈·우홍철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서울 인사동 대신당필방에 붓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김 모필장은 “서예나 회화를 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인사동 대신당필방은 명성이 드높은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결혼하면서 이듬해 서울에 정착했어요. 서울의 방 한칸 월세가 1500원가량이던 때인데, 그때 만든 굵기 18㎜ 붓 한 필이 2만 원에 팔려 나갔습니다.” 당시 좋은 붓에 대한 수요와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대 들어 붓의 원료가 되는 짐승 털을 구하기 점차 어려워졌다. 김 모필장도 그동안 사용되지 않던 털을 이용해 붓을 만드는 궁리를 시작한다. 그렇게 찾은 게 말의 꼬리털이다. 그는 “호주산과 내몽골산 말 꼬리털을 가져다 산마필을 만들었다. 당시 돈 100만 원을 주고 원료를 구해다 인사동에 내놓으니 1000만 원 수익이 났다”고 했다. 산마필은 그대로 그의 ‘시그니처’ 붓이 됐다. 그가 만들어내는 길이 1m 남짓 대형 산마필은 무게가 8㎏, 가격은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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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춘 모필장 |
그럼에도 김 모필장은 붓 만드는 일에 대해 “배우러 오는 이가 없다. 배우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아는 모양”이라며 씁쓸해했다. 고급 교양이 된 서예·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선 여전히 김 모필장의 붓을 찾는 이들이 있지만, 일반 수요가 크게 줄어 ‘명장’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버틸 이가 없다는 의미다.
울산시 모필장의 전승 계보에 이름을 걸친 이들도 김 모필장의 가족들로 한정된다. 문화재 보유자 아래에는 전수교육사·이수자·전수장학생 등 배분이 있는데 실제 김 모필장의 부인 박금식 씨와 딸 김근애 씨만 전수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울산시에 따르면 이들은 2016년부터 5년간 전수장학생만 지냈을 뿐 이수자로는 승급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김 모필장은 문화재 보유자이면서도 자신의 기술을 펼칠 수 있는 ‘사업거리’를 늘 고민한다. 그는 “대학 연구팀과 함께 서예에 쓰이는 먹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20년 쯤 전부터는 신생아의 배냇머리를 이용해 붓을 만들어주는 소일을 했는데 액자 등을 포함해 한 필당 20만 원 안팎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며 “1980년대에도 붓의 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서예붐이 전국에 불면서 한동안 호황이 이어졌다. 전통은 이어지는 것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볕이 들 것 같지 않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한평생을 붓 만드는 일에 바친 만큼, 기력이 따를 때까지는 붓 만드는 일을 이어갈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새겨넣듯 말했다.
※ 제작지원 B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