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럼 많았던 초등학생 시절
- 이야기 시작하면 친구 몰려들어
- 빨랫줄에 걸린 버선 한짝 보며
- 다른 한짝 생각에 눈물 흘리기도
- 풀꽃도, 돌멩이도 귀 기울이면
- 절절하게 자신의 속내 털어놔
- 그말 받아적는게 작가의 사랑법
봄이 성큼 다가왔다. 나뭇가지 끝마다 엷은 연두빛을 머금었다. 겨울 내내 모아두었던 힘을 곧 세상에 내보일 것이다. 어린 새싹을 보면 ‘이 세상이 망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장아장 뒤뚱뒤뚱 걸어가는 아이들,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볼 때도 그런 마음이다. 시작이며, 진행이고, 또 미래다. 그런 기분으로 동시집 한 권을 읽었다. 권애숙 시인의 ‘산타와 도둑’이다. 그의 시집을 여러 권 읽었기에 동시집이 궁금했다. 시인이 쓴 동시집이 어땠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너무 재미있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권 시인을 부산 광안리 집필실에서 만났다.
 |
| 최근 동시집 ‘산타와 도둑’을 낸 권애숙 작가를 부산 수영구에 있는 집필실에서 만났다. |
■호기심 많고 울보였던 소녀
권애숙 시인은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고 있다. 시집 ‘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차가운 등뼈 하나로’ ‘카툰 세상’ ‘맞장 뜨는 오후’ ‘흔적 극장’을 냈다. 김민부 문학상을 수상했다. 동시집 ‘산타와 도둑’은 지난달에 펴냈다.
시인을 만나자마자 동시집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부터 건넸다. 그는 “내 안에 ‘어린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가 썼다고 할 수 있겠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 다.
좋아하는 책들이 가지런한 책꽂이, 넓은 탁자만 있는 소박한 공간에 그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졌다. “전 시골아이였어요. 새까맣고, 비쩍 마르고, 눈빛만 초롱초롱한…. 부끄러움이 많았답니다. 조리 있게 말을 잘 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반장을 시켜주었지요. 소풍날, 반 대표로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나서긴 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지 뭐에요. 그래도 노래는 끝까지 불렀어요.”
아이 권애숙이 학교로 가던 길을 동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따라 가보자. “학교로 가는 길은 멀었어요 . 동네를 빠져나와 공동묘지와 여우가 컹컹거리는 굽은 길을 돌아 고갯마루에 닿았지요 . 잠깐 숨을 돌리는 둥 마는 둥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하면 플라타너스와 측백나무들이 운동장을 둘러싼 학교가 보였어요.”
요즘도 이런 길이 있을까. 어린 소녀가 매일 오가기는 좀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권애숙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친구가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아는 이야기가 떨어지면 이야기를 만들며 걸었다. 그 길은 시인의 마음에 오래 남아 세상으로 뻗어 나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교실 창밖을 보는데 어느 집 빨랫줄에 흰 버선 한 짝이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왜 한 짝 뿐일까, 바람에 떨어졌나, 누가 훔쳐갔나 상상했다. 그러다가 버선의 주인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에 눈물을 주르륵 흘렀다.
호기심 많고 울보였던 소녀는 이제 시인이다. “제가 시인이 될 줄 몰랐어요.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답니다. 그런데 ‘넌 일기를 잘 쓰니까 글을 써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친구들이 제 일기장을 훔쳐보는 일이 많아 화장실 갈 때도 일기장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들을수록 재미있었다. 어쩌면 그 이야기도 시인 속에 있는 어린 권애숙이 들려주는 것이리라.
■시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법
 |
| 산타와 도둑-
권애숙 / 달아실 / 2022 |
권 시인이 동시를 쓰게 된 것은 2015년 동시전문지 ‘동시마중’에서 원고 청탁을 받으면서다. 그 후 5년 여 발표해 온 동시를 엮은 책이 ‘산타와 도둑’이다. 김준철 화백의 그림이 동시집을 장식했다. 어린 시절 그림일기장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재밌고 유쾌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웃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김 화백에게 ‘많이 웃었다’고 전하고 싶다.
동시집에서 요즘 읽으면 딱 좋을 동시 한 편을 발견했다. ‘샘과 마중 사이’라는 작품이다. “누가 이름을 꽃샘이라 지었지? / 꽃샘바람, 꽃샘추위 / 왜 그렇게 불러 대지? / 꽃 피는 거 시샘해서 바람이 분다니 / 꽃 피는 거 시샘해서 추위를 몰고 온다니 / 억울하겠다. / 꽃 피는 거 마중한다고 휙휙 / 달려왔을 뿐인데 / 꽃 피는 거 반가워서 펄펄 / 봄눈 뿌리며 춤추었을 뿐인데 / 꽃마중바람! / 꽃마중추위! / 이렇게 불러주면 안 되나?” 마지막 구절을 읊으면서 답해준다. 암, 그렇게 불러 주고말고. 이제부터는 꽃마중바람 꽃마중추위다.
아파트에서만 살아 온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동시도 있다. ‘우리 집 주소’다. “조금만 더 와요 / 모과나무 집을 지나 / 한 번만 더 둘러봐요 / 개망초꽃 핀 계단을 올라 / 가로등 옆 골목 안 / 보이죠? 담장 대신 /키다리 팔손이 손을 흔드는 곳 / 빨간 장미꼿 페달을 밟는 곳 / 끝 집, 아니 돌아서서 보면 맨 첫 집.”
한 미술관의 기획자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생 대상으로 ‘우리 동네, 우리 집 그리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아이들마다 아파트를 그린 똑같은 그림이더라는 탄식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앞으로는 아이들에게 ‘집’이나 ‘주택’이라는 공간을 특별히 설명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파트 천지다. 그래서 ‘우리 집 주소’는 더 정겹다.
‘산타와 도둑’은 동시집인데, 어쩐지 시보다 더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쉽고 예쁜 말이어서 읽는 순간 환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고, 어린 시절 추억도 되살아난다. 어디선가 아이에게 주려다가 뺏어서 먼저 읽고 있는 어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재미난 상상도 하게 한다.
권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좀 더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에서 그 마음을 엿본다. “언제라도 세상 만물에 가 닿으면 그들도 내게 와 닿아 절절하게 자신을 쏟아냅니다. 엎드려 귀 기울이면 풀꽃도 돌멩이도 모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그들의 말을 받아 적는 일, 시는 미완을 완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법이 아닐까요.”
풀꽃과 돌멩이를 제대로 보려면 키부터 낮추어야 할 것이다. 아이와 눈을 마주칠 때처럼 말이다. 내 안의 ‘어린 나’와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