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서 나고 자란 22년 차 기자
- 하나둘씩 돌아가시는 섬어르신
- 그들의 삶 남기려 13년간 기록
- 일본 원자폭탄 목격한 할아버지
- 포로수용소 탓에 쫓겨난 섬사람
- 바다처럼 생생한 증언들 담아내
“그 섬에 가 보았다는 말. 저는 섬에서 어무이 아부지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밥 먹고, 잠들고…. 그래야 그 섬에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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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통영시 한산면 추봉도 해안 산책로에서 김상현 씨가 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 뒤로 한산도가 보인다. |
‘통영 섬 어무이들의 밥벌이 채록기’를 쓴 김상현 씨의 말이다. 필자는 그동안 어느 어느 섬에 가보았다는 말을 무심히 해왔는데, 앞으로는 그런 말을 못할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어무이’라는 정겨운 단어, ‘밥벌이’라는 눈물겨운 단어에 마음이 흔들렸다. 저자가 통영 섬과 섬사람들, 그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쏟은 마음과 정성이 느껴지는 책이다. 김상현 씨를 경남 통영에서 만났다.
■ 섬에서 어무이 아부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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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섬 어무이들의 밥벌이 채록기- 김상현 지음 / 지앤유 / 2021 |
김 씨는 한산신문과 1인 미디어 통영인뉴스에서 22년째 일해 온 기자이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그는 대학 시절을 빼면 줄곧 통영에서 살았다.
“대학을 다닐 때 무척 힘들었어요. 바다를 볼 수 없어서요.” 그는 “바다를 좀 내려다볼까요”라며 가장 먼저 서피랑 언덕길로 이끌었다. “왼쪽으로 가면 부산, 오른쪽으로 가면 여수로 가는 바닷길입니다. 통영사람은 동바다 서바다로 부릅니다.” 대구탕을 먹고 자랐느냐 물메기탕을 먹고 자랐느냐에 따라 통영사람은 세대 구분이 된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통영과 섬에 관한 이야기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 자도 받아 적지 못했다. 재미있어서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한산도와 추봉도를 안내하겠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긴 했지만,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아니라, 짧지만 알차고 구성진 ‘김상현 투어’에 초대받은 한 명이 될 줄은. 인터뷰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냥 졸졸 따라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서호시장에서 뜨거운 대구탕을 후후 불며 뚝딱 해치우고 한산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김 씨는 직장생활 10년 차를 맞아 심신이 지쳐있던 2008년 무렵, TV에서 ‘그곳에 가고 싶다’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도 아름다운 자연과 정이 많은 사람들, 맛있는 먹거리를 품은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통영의 섬을 찾아다니는 일이 시작됐다. 경남에는 77곳의 유인도가 있는데, 그중 통영에만 42곳이 있다. “통영에는 570개의 섬이 있고, 42곳이 유인도지요. 39곳의 유인도를 가봤어요.”
한 번 간 것으로는 ‘가봤다’고 할 수 없다는 그는 어떤 마음으로 섬에 다녔을까. “섬에 다니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 ‘밥은 묵고 댕기나?’ ‘오늘 잘 데는 있나?’하고 물어보시던 어무이가 한 분, 두 분씩 보이질 않더군요. 돌아가신 거지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통영 섬 어무이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섬과 바다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먹고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
섬을 다니는 동안 그는 통영바다의 동쪽과 서쪽이 다르고 안바다와 바깥바다의 풍경이 다르듯, 삶도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김 씨는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2014)와 2021년 11월에 낸 ‘통영 섬 어무이들의 밥벌이 채록기’에 그 이야기를 나누어 담았다. 두 권의 책을 내는 동안에 섬에 사시던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이번에 낸 책에 나오는 분들도 3분의 1은 돌아가셨습니다. 책을 쓰는 동안에, 책이 나온 후에도요. 책을 낼 때 돌아가신 분들 이름 앞에 ‘고(故)’라는 글자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분들은 이 바다와 섬에 영원히 살고 계시니까요.”
어려운 시절이든, 좋았던 시절이든 바다와 함께 삶을 견뎌내며 가족을 건사해온 어무이, 아부지들.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서 그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는 김상현의 마음이 고맙고 귀하다. ‘진심’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제 어무이가 서호시장에서 고기장사를 하셨어요. 물고기 장사요. 새벽에는 서호시장에서 좌판 장사를 하시고, 동충 통영수협에서 고기를 떼다가 오후에는 도천동(해저터널) 굴앞시장에서 장사를 하셨지요. 울 어무이가 봄이 되면 리어카에 멸치를 싣고, 통영 골목 골목을 돌면서 ‘메르치 사이소, 메르치’외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추억이 저를 섬으로 이끌었습니다.”
책에는 한산도 좌도 비진도 추봉도 지도 곤리도 연대도 노대도 초도 국도의 이야기가 수록됐다. ‘멸치잡이 배를 타고 간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터지는 걸 보았다’는 한산도 이세우 어른, 추석 명절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열세집이 초상집이 된 비진도, 6·25전쟁 중 포로수용소가 건설되면서 강제로 쫓겨난 추봉도 사람들. 섬의 역사와 풍경, 섬사람의 생활과 음식이 담겼다. 어무이 아부지들의 증언이 바다처럼 푸르고 생생하다.
겨우 한산도와 추봉도에 잠깐 발을 디뎠을 뿐인데 의욕적인 가이드 덕분에 통영의 섬이 낯설지 않았다. 감탄하고 감동하다가 정신 차려보니 통영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던 김 씨는 “저 빛나는 윤슬을 보고 있으면 눈빛까지도 선해진다”고 말했다. 잔잔한 물결 사이에서 타닥타닥 튀고 반짝반짝 흐르는 빛, 윤슬이 눈부시다. 햇빛이 바다로 내려온 게 아니라, 바다에서 빛이 올라오는 것 같다. 저 바다는 무엇을 품고 있길래 저리 빛나는가.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는 바다의 선물은 아닐까.